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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갤러리 까르찌나 Jun 07. 2022

이반 크람스코이의 위로할수 없는 슬픔과 안톤체홉의 슬픔

그림과 문학이 만났을때 1편 




안톤 체홉의 <슬픔>과 이반 크람스코이의 <위로할 수 없는  슬픔> 


내 슬픔 누구에게 호소하리…!!

이반 크람스코이가 그린 위로할 수 없는 슬픔

<안톤 체홉의 슬픔>이란 단편소설에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견뎌내는 인간의 서글픈 모습이 그려져 있고 <크람스코이의 위로할수 없는 슬픔>에는 이미 자식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마른 눈물을 삼키는 엄마의 비통함이 그려져 있다. 


그둘의 슬픔은 같은 빛깔, 같은 깊이다. 


<체홉의 슬픔> 속 가난한 마부 이오나 포타포브는  얼마전 아들을 잃었다. 아들을 잃은 이오나의 절망을 표현하기 위해 체홉은 촉촉한 함박눈을 등장시킨다 


'마부 이오나는 마치 유령처럼 온통 하얀색으로 덮여 있다. 그는 살아있는 육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몸을 웅크리고서 마부석 위에앉아 꼼짝도 안한다. 설령 눈더미가 덮친다 해도 그는 그 눈을 털어낼 필요를 못 느낄것 같다…. 그의 말 또한 하얗게 덮인채 움직임이 없다. 꼼작 않고 있는 모습이며 각이 진 형상, 거기다 막대기처럼 뻣뻣한 다리때문에 말은 가까이에서 보더라도 마치 말 모양으로 찍어낸 일전짜리 당밀 과자 같았다' 라며 가난한 마부 이오나의 비통함을 묘사한다. 툭건드리듯 그렇게 슬픔을그려낸다. 


또, 아이를 묻고온 엄마의 처절함을 보여주기위해 크람스코이는 눈물조차 메말라 마른 울음만을 삼키고있는 그녀의 슬픔을 손수건 한 조각에 의존해 버텨내는 모습으로 등장시킨다. 울부짓는 통곡은 없지만 그녀가 입고있는 검은 상복위로 견뎌내는 안간힘이 그대로 베어져 나온다. 뭐라고 한마디만 건네도 그녀는 풀썩 쓰러져 버릴것 같다. 그렇게 화가 크람스코이는 이 아픔을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라 명명하며 삼키고 참아내게 만든다. 


  소설 < 슬픔>속 함박눈과 <위로할수 없는 슬픔>의 손수건과 검은 상복은 같은 모습, 같은 슬픔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뎌내는 이오나는 천지가 무너질 것같은 이 고통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위로 따위는 감히 바라지도 않지만 그냥 털어내고 싶었던거 같다. 하지만 마차를  탄 손님들 누구도 그의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심지어 함께 일하는 동료 조차도 이오나의 슬픔 따위엔 관심도 없다 .


결국 그 슬픔을 함께 하는 건 이오나의 말이다.  이오나의 슬픈 넋두리에 응답하듯 마부의 말은 주인의 손 위로 숨을 내쉬기도 반짝이는 눈망울로 눈동자를 맞추기도 한다. 그렇게 이오나는 자신의이야기를 말에게 풀어낸다.  


“아무렴, 내가 이제 마부 노릇 하기는 너무 늙었지? 내 아들놈이라면 얼마나 잘할까? 틀림없이 일등 마부일 텐데, 살아 있기만 하다면 말야.” 


이렇게 털어내듯 슬픔을 이야기 한후 마부 이오나는 또 삶을  견뎌 낼 것이다 .


 또, 자식을 먼저 보내고 마른 울음을 삼키는 여인 옆에 화가 크람스코이는 아직 싱싱하고 갓피어난 꽃 화분을 그려넣는다.  그렇게 슬픔을 토해 낸후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처럼  다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작가의 염원을 시들지않은 꽃더미를 통해 보여준다. 


체홉의 마부도 , 크람스코이의 여인도 걸어다니는 무덤이 되어 절박한 삶을 살겠지만 그래도 견뎌 낼 것이다.  이 두 천재 작가들은 그렇게 또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풀어내고 이야기 해 낸다. 


그래서 체홉의 슬픔도, 크람스코이의 위로할수 없는 슬픔도 닮은 꼴이다.

안톤 체홉 의 초상화<오시프 브라즈가 그린 (1873-1936) 안톤 체홉(1860-1904)의 초상(1898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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