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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hmitz cabrel Sep 17. 2020

08   친밀한 사물들 1

<공중을 선회하는 여행>,  여수 오동도/제주도 산방산/이탈리아



여수 오동도




1



여행을 가게 되면 평소보다 더 친밀해지는 사물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돌’이 그런 사물이다.


익숙한 이곳을 떠나면, 나는 도시에서든 자연에서든 돌을 향해 다가가고 머무른다.


작년 겨울, 친구 Y와 간 여수 여행에서는 오동도의 큼지막한 갯바위에서 너무 오래 놀아버리는 바람에 다른 일정들을 취소해야 했다.


이런 습관이 든 계기라면 정확히는 기억에 없는데, 높은 확률로 바닷가의 기암절벽을 느꼈을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2



십 년 전쯤, 제주를 일 년에 몇 번이고 드나들 때가 있었다.


하얀 거품을 뱉어내는 바다와 순간순간 이지러지는 수평선도 사랑했지만,

나는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저 절벽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결국 긴 여행 삼아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제주에 발을 붙였을 때,

칠일 중 삼일은 여행을 다녔고, 나머지 나흘 동안은 두세 시간 낮 산책을 다녔다.



나의 낮 산책코스는 이러했다. 버스를 30분 정도 타고 나가 산방산 앞 정류장에 내린다.


산방굴사에 오르며 날카롭고 정교하게 깎아내린 산의 암벽을 바라본다.


산방굴사에서 내려오면 무성히 핀 풀길을 따라 바다로 간다.


관광객들의 들뜬 대화와 군것질 따위로 부모와 실랑이하는 아이들을 가로질러,

혹은 그들 중 일부와 함께, 용머리해안에 도착한다.


돌과 물이 뒤섞이는 모양을 보며 조심스럽게 검은 절벽을 걷는다.


이 물결치는 암벽이 사실은 나 모르게 꿈틀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손으로 돌을 짚는다.


귀는 온통 바다와 돌이 부딪치는 소리만 담는다. 그렇게 한 시간여 동안 용의 머리를 거닌다.


나의 하루 중, 그 한 시간이 물리적으로든 심적으로든 가장 활동적인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공상따위를 종종했다.


언젠가 내가 바닷속에 들어가서도 일어설 수 있을만큼 거대해져서


커다란 손가락으로 검은 돌의 갈라진 모양을 만지고,


손바닥으로 그 뒤틀린 모양을 잡아보고,


또 손접시에 물을 가득 담아 용머리와 산방산에 떨어뜨려 방울진 물을 바라보면 어떨까라는,


돌은 왜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라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용머리해안





3



돌은 보는 습관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 명의 관광객으로서, 무수한 시간을 품은 오래된 건축물들과 조각들을 보는 것을 즐긴다.


그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간혹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느끼지만 그 시간을 간직할 수는 없다. 

방문자는 곧 걸음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역사를 좋아하는 H와 이탈리아에 갔을 때는 오래된 유적들이 도처에 있어 그런지, 

밤마다 이상한 꿈에 시달렸다.


그러나 피로하기보다는 가슴 두근거렸다.


열흘의 대부분을 폐허로 남은 유적들과 유적을 바라보는 H를 보면서

영국 드라마 닥터후의 주인공인 닥터의 대사를 떠올리기도 했다.



"돌은 거대한 송신기다."1)



피렌체 캄피돌리오 광장의 아우렐리우스 황제 옆에서 행복감에 찬 H가 황제의 명상록에 대해 이야기할때,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 앉은 사자와 천사의 동상을 지나갈 때, 

두오모 옆 조토의 종탑을 오를 때도 이 문장을 생각했다.



특히 종탑을 오르기 위해 원형의 좁은 계단을 걸을 때, 온 나라 사람들의 이름 낙서들, 숫자가 새겨진 열리지 않은 문들, 군데군데 뚫린 창을 바라보며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인 탑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는 꼭 다른 시공간에 와 있는 듯했다.



탑 꼭대기를 메운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날 비가 왔기 때문에 가까운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그 뒤로는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이 뒤따르고 있었다. 


대성당의 붉은 지붕 그림자가 땅 위로 내려앉았다. 드디어 해가 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종이 정오를 알렸다. 그러자 다른 종들도 울었다.


종들이 울자 사람들은 말을 멈추었다. 저 멀리 강물이 흘러가고, 도로 위에 앰뷸런스가 지나갔다.


종소리가 그치자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해가 나고, 종이 울린다. 시간이 뒤섞인다.


당시의 기억은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나에게 남아있다.




조토의 종탑 안 원형 계단








4


베니스




시간의 유산들은 그 자리에 남아 끊임없이 인간을 부른다.


그들이 전송하는 모든 역사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아주 낮아서 나는 친밀한 마음으로 돌에게 바짝 다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시간에 둘러싸여 있는 그 순간을 그들처럼 나도 사랑해마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역시 이 세계를 더 알고 싶다.





포로 로마노


캄피돌리오 광장







-end




1) 영국 SF드라마 닥터후 시즌5 12화 <THE PANDORICA OPENS>.

닥터가 영국의 스톤헨지의 지하에 들어가 돌기동에 관해 말하는 장면이다.

지하의 돌기둥은 우주적인 중대한 사건을 모든 시간대, 모든 사람들에게 전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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