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hmitz cabrel Dec 20. 2020

11  헛수고라는 이름의 애정과
새별오름

-<공중을 선회하는 여행>, 제주




첫 직장에서 동료를 좋아하게 되었던 적이 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그 애를 잊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별 성과가 없어 결국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제주섬으로 들어가 몇 군데의 민박집에 묶었고, 매일 아침 근사한 이름을 가진 오름들을 올랐다. 가끔 택시를 탈 때마다 그 애 만나러 간다고 쓴 만 원짜리 지폐가 떠올랐다. 무슨 돈이 있다고 만 원짜리를 스스럼없이 써댔을까, 라고 반문하면서 제주에서도 똑같은 짓을 했다. 밤에는 그 애에게 전화를 걸을까 말까, 서른 번 정도 고민한 다음 전화를 하지 않거나 그 애에게 전화를 했다. 민박집 주인인 해녀가 차려준 밥상은 해물도 싱싱하고 나물도 꼬독꼬독하니 참으로 맛있었지만 고봉밥을 먹느라 반찬은 많이 먹지 못했다. 겨울숲에서 길을 잃어 농장 주인을 만났을 때는 불쌍해 보이지 않으려고 바쁜 와중 잠시 휴가를 나온 전문인력인 척을 했다.      



제주, 어딘가의 오름 위



그날 아침도 고동색 코트에 죽상을 하고 버스에서 올랐다. 새별오름 앞에 내렸는데, 내 발치에서 두세 걸음 정도까지 밖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난히 안개가 짙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름 입구를 찾으려 이리저리 헤맸다. 인기척을 찾으려 두리번거렸으나 보이는 것은 흰 안개뿐이라 내가 손을 흔드나 소리를 치나 달라질 것이 없었다. 물론 오전 7시경 그 허허벌판에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하릴없이 이쪽저쪽으로 거의 갈지자로 걸었다. 얼마 뒤 몇 개의 무덤이 나왔고, 따그닥대는 발소리와 헐떡대는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을 더 떼자 내 앞에는 몇 마리의 말과 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철창 안에 있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철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쳐다보았다. 눈을 희번덕대는 말을 보며 그때 말의 흰자위가 넓다는 것을 알았다. 철창 옆에 난 길을 따라가 보았지만 오름으로 향할만한 길은 없었고, 대신 온 사방에 말과 소의 똥만 많았다. 나는 오로지 나만 보이는 안개 속에서 똥들을 밟으며 걸어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서서 생각보다 심하지 않은 똥들의 냄새를 생각했고, 똥무더기가 가득한 땅 위에 서 있는 나를 생각했다. 말과 소들은 따그닥대며 내 곁을 따랐다. 나는 시린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히히힝 우는 말과 음메하고 우는 소들과 함께 안개를 삼켰다.      


잠시 후 멀리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더니 열 명 남짓의 등산객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똥무더기 위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매우 놀랐고, 무슨 이유로 이러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새별오름에 오르려 했다고 말했고 그들은 친절하게 나를 새별오름 위까지 데려가 주었다. 그들은 이른 아침 오름 산행을 나온 주민들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특유의 활기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곳은 혼자서 다니기 안전하지 않으니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들의 친절을 정중히 거절했다. 왜왜거리는 섬바람을 뚫고 숙소로 걸어와 남은 아침잠을 잤다. 그리고 그날 오후 친구의 전화를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친구는 왠지 모를 이유로 울면서 술을 마셨다. 그날 밤엔 친구 집에서 잤다. 꿈에서 나는 말과 소들과 함께 안개 속을 걸었다. 우리가 어디로 간 건지 나중엔 발치조차 안개였다. 아마도 구름 속이었나보다, 하고 덜 깬 눈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제주, 어딘가의 오름



제주섬에서 혼자 좋아하던 애에게 쓴 엽서 몇 통은 영영 잃어버렸다. 사실 얼마 전 그 몇 통 중에 하나를 찾았는데, 엽서엔 이층침대에서는 도무지 잠을 못 자겠다는 헛소리만 적혀 있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다. 엽서는 버리려다가 사진이 너무 예뻐서 창가에 세워놨다. 얼마나 많은 오름을 올랐는데, 엽서에 있는 오름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신 안개와 말과 소의 새별오름만이 어쩐지 내 장기기억에 저장되어있다. 향긋한 똥무더기의 냄새와 그때의 나와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10   겨울이 될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