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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hmitz cabrel Sep 02. 2020

03   혼혼한 밤산책

<공중을 선회하는 여행>, 경주






P의 손을 잡고 등 하나 없는 시골길을 걸었다. 경성시대 대저택의 대문같은 철문을 지나고부터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쥐 발톱만한 불도 없어서 위아래 동서남북이 까맣고 어두웠다. 아무런 기척도 없기에 나는 개 짖는 소리라도 있었으면, 하다가 아니다 그건 더 무서워, 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척 없는 컴컴함 역시 무섭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거나 등을 찌를지도 모르고, 어디선가 모르는 동물이 나와 목을 콱 물어버린데도 그 전조를 전혀 알 수 없거니와, 당한 후에도 그것들에 둘러싸여 이승의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P의 손을 더 꽉 쥐었다. 땀이 차는 것을 보니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까 되돌아갈 걸 그랬지.」

「이리로 괜히 왔어.」

「너무 인적이 드문 데로 걸었나.」

「석빙고 들렸다가 차 다니는 도로로 나갈 거를.」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는 태어나고 처음이라 구멍으로 쑥 꺼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서 한꺼번에 말했다. P와 둘이 여행을 할 적엔 길만 있으면 어딘지도 모르고 걸었다. 그래도 언제나 무언가 나타났다. 말도 무덤도 나비떼도 숲도 바다도 마을도 나왔다. 그날도 그렇게 바다고 릉이고 탑이고 지나며 신나게 걷다가 자비 없는 밤길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드문드문 생각나는 대로 계속 내뱉었다.


「나 언니 안 보여. 언니 나 보이나.」


P는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이거 안경인가.」


그리고 내 귀를 잡았다.


「논에 빠져버리면 어떡하지.」


「안 빠진다.」


「밤새 여기서 헤매다가 개라도 나타나면?」


「개 다 지 집서 잔다.」


「영영 불빛이 안 나타나면?」


「나온다.」


그리고는 다리가 나올 것 같은데. 라고 해서 나는 조금 진정이 되었다. P가 이끄는 대로 좇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사물의 윤곽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달도 없는 밤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무섭지 않아?」


「응. 이런 데 종종 있었지.」


조금 있다가 그녀가,


「사람이 더 무섭지, 길이 무섭나.」


하길래, 나란 인간은 또


「사람 나오면.」


했고, 그녀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라고 해서 또 겁이 나 잡은 손을 더 꽉 쥐고 흔들어댔다. 팔을 흔들어대니까 마음이 좀 나아져서 발을 움직였다. 얼마가 지난 후 드디어 눈에 빛이 들었다. 저 멀리 어둠이 누르스름한 빛 주변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다리 옆에는 우리가 방문했던 빵가게가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대낮에 빵 사 먹고 웃던 이들도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말했다. 


「무서웠다.」






애처럼 말했다. 안심하니까 말이 또 한꺼번에 나왔다.



「신기하다. 어떻게 논밭에 안 빠졌지.」

「근데 재미도 있었지?」



나는 길을 잃은 적이 있어도 P는 잃은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돌아서 가거나 다른 길로 간 것뿐이다. 내가 무서워하면, 그녀는 뭐가 무섭니 했을 뿐이다. 


밤의 등불같은 누런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P가 더 무선 건 다른 데 살지, 라고 해서 나도 맞어 맞어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드문드문 난 빛을 따라 숙소로 걸어갔다. 


어둠과 빛이 번갈아 앉은 길가엔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 밤은 오직 우리 둘의 것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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