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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혐오스런 일생일지라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7)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봤다. 과할 정도로 강한 원색 계열의 색감들과 뮤지컬 영화에서 볼 법한 효과와 웃긴 연출이 영화 끝까지 함께 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영화의 코믹한 연출로도 가릴 수 없던 마츠코의 일생에는 슬픔이 있었고, 그건 단순히 마츠코의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마츠코의 일생은 혐오스러운 인생이었다. 20대 여교사에서 자신의 한 실수로 인해 불륜녀와 창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삶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죽는 순간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녀의 삶은 영화 속 대사와 같이 "어떻게 봐도 그저 시시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이토록 혐오스러운 일생이지만 마츠코는 혐오스럽지 않았다. 그녀의 일생과 다르게 마츠코가 원한 건 단지, 사랑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 삶을 떠올리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에 대해서 물었을 때 나는 대단한 직업이나 꿈을 이야기했다. 그 때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자라면서 그것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 하나 만으로는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뮤지션이 되고 싶어 집을 나온 '쇼'가 꿈과 다르게 여자친구에게 차이는 시시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처럼, 내 인생도 오히려 꿈에 가까이하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현실에 의해 혐오스럽게 변해갔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고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며 단정을 짓고 현실에 맞춰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 마츠코처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후회를 한다. 


 하지만 혐오스럽게 변한 건 마츠코의 일생이지 마츠코가 아니다. 영화는 인간의 가치라는 것은, 뭘 받느냐가 아니라 뭘 해줄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로 정할 수 있다. 수년의 취준과 수험생활 그리고 고시준비 끝에 설령 실패하는 혐오스러운 일생 속에서도 인간의 가치는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음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혐오스런 과거를 딛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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