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윤 Dec 15. 2020

그래도 살 만한 세상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길

강남까지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일명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출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고 코앞에서 내뿜는 누군가의 숨에 얼굴을 찡그려가며 다니기를 몇 해.


그렇게 나의 몸과 마음은 너무도 지쳐갔다. 퇴근 시간이 되면 즐겁기보다는, 포화 상태의 지하철 안에 몸을 실을 것이 걱정되었을 정도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상사의 잔소리 폭탄에, 심지어 컨디션도 좋지 않아 한계에 도달한 나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버스를 타고 편하게 앉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강남역에 도착하자마자 냅다 달려 줄을 섰다. 버스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이 정도야, 뭐.

하지만 갑자기 하나, 둘 떨어지는 빗방울.
오, 신이시여. 제가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퇴근하는 게 그리 싫으셨나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고, 비가 오는 줄 몰랐던 나는 급한 대로 가방으로 머리를 가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뒤에는 편의점이 있었지만, 우산을 사러 갔다 오면 다시 맨 뒤의 줄로 가야 했기에 나는 발만 동동 구르며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버스가 오려면 10분은 기다려야 하는데….


빗줄기는 더 세차게 변했고, 우산을 쓰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나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어, 금세 서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옆줄에 서있던 아주머니께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시다 갑자기 쓰고 계시던 우산을 나에게 쑥 내미셨다.

“아가씨! 이거 쓰고 가요!”

너무 놀라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굳이 우산을 쥐어주신 아주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버스 내리면 바로 집 앞이야. 감기 걸리지 말고 쓰고 가요!”

그리고 아주머니는 버스에 몸을 싣고 홀연히 떠나가 버리셨다.
우산을 손에 든 채 멍하니 떠나버린 버스를 바라보았다. 분명 감사한 마음이 컸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와 커다란 우산을 낮게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사회생활을 하며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게 되었고, 그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적도 허다했다.

그래서일까. ‘사회는 무서운 곳이고, 세상 사람들은 이기적이야.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지.’라는 선입견이 나도 모르는 새에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점점 더 그 마음이 커질 때쯤, 선뜻 본인의 우산을 건네주셨던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날은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내가 1시간 반이 걸려 버스에서 내렸을 때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기억이 희미해져 아주머니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우산을 건네주시던 그때의 상황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때 너무 갑작스러워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따뜻한 사람이 있구나, 아직 살 만한 세상이구나, 하고 느끼게 해 주신 유일한 분이세요. 제게 건네주신 따뜻함만큼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매거진의 이전글 참을 수 없는 인간관계의 가벼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