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대학을 졸업했는지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이다. 어느 학기에는 올 F를 맞은 적도 있었다. 전공 교수에게 밉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한 학기를 더 다니고 가까스로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되었다. 대학 동기들은 대학원을 가거나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말없이 사라졌다. 나는 당시 몇 년째 술과 장미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되는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계획이 없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미술사학과'라는 것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미술실기가 안된다면 미술이론 쪽으로 해보라는 것이었다.
80년대에 존재했던 미술이론 계통의 학과로는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과, 미학과, 미술교육과가 있었다. 1988년 나는 H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입학했다. 미술사학과는 학부에 전공이 없기 때문에 대학원에는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문과나 불문과 등 외국어 전공자들이 가장 많았지만, 인문계열뿐만 아니라 이공계열 쪽에서 온 사람들도 간혹 있었고 미대를 나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미술사 수업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아마 다들 그러한 듯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대학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거 없이 초보티가 났다. 게다가 대학원은 본인들의 선택이었을 테니 다들 초집중해서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어떤 사실을 선택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므로, 미술사 역시 교수들의 성향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났다. 그러나 그 선택과 해석이 본인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접할 수 없었던 방대한 자료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두를 열광케 했다. 또한 미술이라는 것이 정치사회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같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을 고증을 통해 목격하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공부가 재밌다니!!! 내 인생에서 이때만큼 공부가 재밌었던 적도, 그만큼 열심히 한적도 없었다. 수업시간에는 열심히 노트에 필기를 했고 수업시간에 본 작품들을 빼먹을까 봐 그려놓기도 했으며, 그 작품들을 잊지 않기 위해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도서관에 가서 그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화집을 찾아 사진을 찍고 슬라이드로 만들었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으로 찍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 도서관엔 사진기로 화집의 도판을 찍을 수 있는 거치대 같은 것이 있었고, 사진기를 그 거치대에 고정시켜 놓고 그림의 크기에 맞추어 접사렌즈를 이것저것 바꿔 끼워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물론 사진기도 필름 사진기였고, 슬라이드 필름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사다 끼워서 찍은 다음에 현상소에 가져다가 맡기는 식이었다. 굉장히 번거롭고 시간도 걸리는 과정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모두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했다.
미술사학과 학생에게 사진기는 필수였다. 도판을 찍는 것뿐만 아니라, 유적지 답사나 박물관, 미술관 등 견학을 하거나 기록이 필요할 때 사진기는 꼭 있어야 했다. 역사학에서 기록과 자료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답사’는 미술사학과에서 매우 중요한 공부였다. 직접 루트를 따라가면서 지형지물을 관찰하고 몸으로 체험하고 기록하는 일,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새로운 공부, 확인하는 동시에 발견도 가능한 공부.
나는 한국미술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국내의 문화유적지 답사를 많이 다녔다. 학교에서 가는 것도 있었고, 민간 수업에서 가는 것도 있었다.
민간 수업 중 당시 유홍준 교수의 미술사 강의가 엄청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대안적인 시각과 수업방식이어서도 그랬지만 유홍준 교수의 입담이 결정적인 인기비결이었다. 유홍준 교수는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아주 맛깔난 입담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갖춘 분이었는데, 그분의 강의는 항상 매진이었으며 많은 수강생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유홍준 교수의 입담에 배 터져라 웃어댔던 버스 안의 분위기와 함께, 그때 갔던 문화유적지들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문화유적지 답사를 다니면서 한국에 이렇게나 아름답고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좁은 땅덩이에 이런 비경들이 숨어있었다니… 답사를 다닐 때마다 나는 감탄했고 탄식했다. 비록 터만 남은 곳도 있었지만 그 장소들은 항상 경건하고 고요하며 신성했다.
답사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곳은 경주에 있는 남산이었다. 그 산은 산 전체가 민간신앙의 요지였다. 곳곳에 민간인들이 만들고 새겨놓은 미륵불들이 숨어있었다. 우리는 힘들게 가파른 산을 오르기도 하고 위험한 곳을 지나기도 하고 거친 숲을 헤치기도 하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그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흔적들을 발견하면 땀을 훔쳐가며 감탄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작품 자체가 완성도있게 훌륭해서라기 보다는 그 장소의 의미와 비경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아, 이래서 굳이 여기에 작업을 해놓았구나,라고 단박에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이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미륵불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저절로 합장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낮의 답사를 끝내고 밤이 되면 거나한 술판이 벌어지며 열띤 토론의 장이 펼쳐지곤 했다. 이건 이러네 저건 저러네 그게 아니네 네가 틀렸네 내가 맞네… 서로 자기의 주장을 펼치면서 때로는 우기기도 하고 때로는 인정하기도 하는 그런 장면들이 이어졌으며 결국 마지막은 낭만적인 떼창으로 끝이 나곤 했다. 대학시절, 공부라고는 해본 적도 없고 술과 장미의 나날을 보내던 나는 이렇듯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