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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고운 Nov 21. 2022

육아일기 대신 회의록

1. 딩크 실패자들


“언제쯤 박서방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을 할 건가~?”


결혼 후 삼 년이 지난 어느 주말, 간단히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엄마는 또 난데없이 아이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흐렸다. 막무가내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지만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혼란한 메시지에 남편은 내 눈치를 보다가 항변하듯 말했다.


“아니 그럼 제가 억지로 씨를 뿌리란 말입니까?”


평소 점잖은 남편의 거침없는 표현에 나는 빵 터졌다.


“하하하 정말 내버려 둬 좀. 난 애 안 낳을 거라고 처음부터 이야기했잖아."


우리의 목표는 딩크 부부였다. 아니다. 사실 남편의 목표는 아니었을 것이다. 십여 년의 연애 기간 동안 남자 친구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임신과 출산의 결정권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고 힘주어 이야기하곤 했다. 내 일을 계속하고 싶은 나에게 임신 출산 육아는 걸림돌이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취업과 유학 그리고 창업으로 내 삶은 분주했다. 내 마음속에 빼곡히 적어둔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로 가득 찬 리스트가 내 삶의 선택 기준이었다. 이런 나의 우선순위를 존중해주는 파트너라면 결혼을 하고도 내가 나답게, 우리가 우리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하며, 우리는 이제 평탄한 결혼 생활을 할 것이라고 단단히 착각에 빠져있었다. 남편은 결혼을 하고 나면 우리의 관계는 고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은 법적인 약속이니, 이제 그 약속을 지키며 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나면 우리의 관계가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은 일상의 공유이니, 이제까지 보지 못한 서로의 면면을 더 깊이 알아가는 모험이 될 것이다.


신나는 모험도, 편안한 안정도 아닌 낯선 일상이 시작되었다. 첫 일 년은 서로의 생활 습관에 대해서, 두 번째 해에는 원가족 관계로부터 비롯된 불만에 관해서, 그리고 세 번째 해에는 서로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을 이해하지 못해 싸웠다. 오랜 착각의 밑바닥에서 이렇게 우리의 관계는 끝나나 보다 싶었던 어느 날, 의외의 비극이 우리 관계에 극적 변화를 가져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키웠던 강아지에게 인지장애(치매)가 왔다. 낮과 밤이 바뀌어 울어대는 노견은 어느새 부모님 댁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있었다. 남편과 상의 끝에 열여덟 살이 된 강아지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눈이 멀고, 디스크 증상으로 허리가 굽어 걷기가 어려워지자 수소문하여 휠체어를 맞추었다. 근 이십여 년을 한결같이 내 인생에 아이는 없다는 말을 주술처럼 되뇌며 살았는데… 치매 강아지의 기저귀를 갈고,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앙상한 몸을 끌어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이 정도의 무게면 신생아 정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을 꼬박 나는 강아지를 돌보고 남편은 그런 나를 돌봤다. 나란히 앉아 신생아 기저귀에 꼬리 구멍을 내는 작업을 할 때면 참 이상하게도 이 사람과는 아기를 함께 돌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삶을 기대하며 기저귀를 가는 일은, 죽음을 준비하며 기저귀를 가는 고통보다는 덜 힘들지 않을까?


어느 주말 우리는 설마 되겠어?라는 마음으로 피임 없는 섹스를 연습(?)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아기는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몇 주 후, 나는 그냥 알았다. 무언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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