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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 Nov 24. 2020

라떼는 말이야, 2020 싸이월드 다이어리.

제주 한 달 살기 7일 차 섭지코지 

비가 온다던 소식과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화창한 날씨를 보여준 제주도.



박물관을 가자라고 생각했던, 원래의 계획은 무시하고 

무작정 생각나는 ‘섭지코지’로 향했다. 

계획이 없었기에, 문득 떠오른 그리운 여행지로 일단 향한 것이었다. 


오래 전 제주도 방문 때 2번이나 와 봤던 곳.

그래서 10년 동안 한 번도 섭지코지로 향하지 않았던 나는, 

완전히 달라진 섭지코지의 모습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올인’ 하우스가 없어지다니...!

(올인* 2003년 드라마로 이병헌과 송헤교가 주연을 맡았다.)      

내겐 섭지코지는 오직 올인 촬영지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바다 바로 옆 언덕 위에 아름답게 서 있는 집 한 채 (드라마상 수녀원)가

볼거리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한 대 얹어 맞은 듯, 

충격이 가시지 않아 

잠시 멍하니 (내 기준) ‘이상한 과자 집’을 바라보다가 


이야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세월은 많은 걸 바꾸는구나를 아주 조금, 

실감했다.      



“라테는 말이야~라떼는 말이야~2003년도엔 말이야~” 를 

흥얼거리며

걸음 걸음을 떼다, 문득 씁쓸해졌다.


라떼는 ,..음... 나 때는 

인스타도, 페이스북도 아니고

오직 싸이월드가 최고였는데.....  


1. 

싸이월드에 일기를 쓰던 시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를 쓰던 시절이었다. 

아니다. 

그 누군가를 향한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일기로 끝나는 나날이 반복됐다. 

사랑 타령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허세 가득한 문장과 어쩌면 날조된 감정들로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고자 애를 썼다.

우습게도 지금 이 글을 쓰며, 그 버릇이 여전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2008년. 새 학기를 시작하는 9월의 어느 날엔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두렵고 낯선 나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한탄하는 글을 싸이월드 일기장에 올린 적이 있다. 여느 때처럼.      

 

그곳에 ‘난 너 좋아’라는 단 세 단어를 적어 준 친구가 있었다.      


풍#림. 특이한 성 덕분에 ‘풍림아파트’가 평생의 별명이었을. 

그래서 여전히 별명이 ‘풍림’인 친구였다. 



유난히 커다란 입을 지녀서 웃을 때면 함께 있던 사람들은 우와하고 탄성을 지를 정도였고,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늘 주변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가득했다.      

특별히 친한 친구는 아니었고, 그냥 한 번 정도 함께 조별 과제를 했었고, 한 학기 내내 함께해야 하는 프로젝트 수업에 엮인 적이 있는 수준의 친구였다. 

함께 1개월간의 필리핀 단기 어학연수도 갔었지만, 수업 그룹이 달라서 그냥 오고 가며 너희 그룹은 어때 소식을 주고받는 정도. 

아...., 생각해보니 우연히 시간이 맞아 다수의 친구들과 함께 신촌에 한번 놀러 간 적도 있었다. 

별로 인연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인연을 맺고 있었구나....      

그 친구가 나의 싸이월드에 처음으로 남긴 댓글이었다. 


“난 너 좋아”      


당시에 ‘인싸’란 말이 없었다. 

그래서 표현하기 다소 어렵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갖춘 친구’가 남겨준 한 마디는 

가슴을 몽글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쓰는 일기를 읽는 것이 재밌어서 종종 와서 읽곤 했다곤 했다. 

그 말에 난 또, 괜히 어깨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었지..      


2. 

학생이란 울타리에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정신없이 분주하던 여름방학이 지나갔다. 

방학 내내 단 한 번도 개인적 연락을 주고받은 적 없던 그 친구를 학교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의 첫 반응은 ‘헙’이었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몸이 한 눈에도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경쟁률 높은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견뎌내는 것이 이렇게 피곤할 줄 몰랐다며 

그 큰 입을 쩌억 벌리고 웃어 보였기에, 그래도 취업시장에서 성공했다며, 크게 따라 웃었었다.     


아쉽게도 그 친구는 더 이상 싸이월드를 하지 않았다. 

사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이란 새로운 SNS에 열광했고 

그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싸이월드 한편에 페이스북 주소가 적혀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홀로 싸이월드에 머물렀고 일촌공개로 일기를 쓰며 나만의 감성을 채웠다.     

졸업 후 3년쯤 지났을까. 


문득 풍림이의 싸이월드에 새로운 소식이 올라왔다.


NEW.


당시, 새로운 글이 올라오면 그 NEW라는 표시가 뜨곤 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 간 그곳엔 풍림이가 오랜 투병을 끝내고 평안을 찾았다는 소식. 전 세계

를 누비고 싶다던 그 아이의 꿈이 이뤄질 것이란 편지가 적혀있었다. 

담백한 문체로 감사함을 전하는 페이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며칠을 앓았다...

       

3. 

마음이 시끄러운 날이면 가만히 앉아 일기를 쓴다. 

그렇게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적어 내려가다 사라져 버린 싸이월드에 괜한 화풀이를 한다.

15년 넘게 내 일기장이 되어주던 공간이었는데, 사라져 버리다니.  

이제는 아무도 내 부끄러운 속내를 읽어주고, ‘난 너 좋아’라는 응원을 남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밉다.

 ‘난 너의 일기가 재밌어. 꼭 작가 같아’ 그 목소리가 여전히 살갑다.     

그래서 참 오랜만에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적어 내린다. 오늘의 일기를 읽으며 네가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정보>

섭지코지의 입장료는 <무료>다.

다만 주차장 이용료는 따로 결제를 해야 하는데,

주차 30분 1,000원 (이후 15분당 500원)이 발생한다. 

길을 따라 사뿐사뿐 산책하기 좋으며,

산책로 끝 쪽에선 우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제주도에 머물면서 떠오른 생각들, 여행일지들을 기록합니다. 
한 달 살기를 지켜보고 싶으시다면 구독과 라이킷 부탁드려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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