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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맑음 Mar 19. 2022

백 년 동안의 고독, 레베카는 왜 흙을 먹었을까?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

엄지손톱이 사라졌다.


화이트데이, 가장 많이 팔리는 사탕이 추파춥스일까? 아이들이 쪽쪽 빨고 있는 사탕에서 과거의 나를 보았다.


엄마를 차지하고 싶어서, 헤어지기 싫어서, 이기고 싶어서, 혼나기 싫어서, 울지 않고 버텨내기 위해.. 나는 그때마다 엄지 손가락을 빨았다.



레베카,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그녀는 나를 닮았다. 글을 통해 만나는 레베카의 행동이 그림을 그리듯 살아났다. 잊고 있던 엄지 손가락을 나도 모르게 만지작거렸다. 그녀도 나처럼 그랬을까. 그녀는 왜 손을 빨고, 흙을 먹었을까.


그녀가 그 나이에도 여전히 손가락을 빠는 버릇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중략) 레베카는 다시 흙을 먹기 시작했다. 고약한 흙 맛이 오히려 흙을 먹고 싶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이 될 거라 믿고서 처음에는 거의 호기심에서 흙을 먹었다. 실제로 입 속에 넣은 흙 맛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증대해 가는 갈망을 이기지 못한 채 계속해서 흙을 먹어댔으며, 차츰차츰 옛 입맛과, 흙이라는 원생 광물에 대한 기호와, 흙에 함유된 기초 영양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개운한 만족감을 회복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 105p)


일러두기/독서모임에서 3월의 도서로 선정한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펄펄 끓는 얼음” “데워지지 않는 우유”등.. 마술적 리얼리즘, 주술적 기법이 자주 등장한다. 마술적 장치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레베카의 마음으로 들어가 글을 써보려고 한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살기 위해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맛있어 보이는 흙을 찾기 시작했다. 대문 옆에 소담하게 봉긋 솟아있는 흙무더기. 심봤다. 어제 내린 비로 마당도 흙도 먹기 좋게 축축하다. 지렁이들이 만든 흙무더기가 틀림없다. 지렁이들이 만들어낸 줄무늬를 보고 있으니 예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어라? 왜 눈물이 나지? 눈물이 입술에 고였다. 짭짤하다.


“나 좀 살려줘. 나도 어쩔 수 없어. 널 먹어야겠어.”


두 손 가득 축축한 흙을 퍼 올렸다. 흙이 내 손가락을 밀어내더니 스르륵 빠져나갔다. 다시 흙을 모아 올리고 손가락에 힘을 꽉 주었다. 이번엔 흙이 손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큭! 너무 간지러워 흙 뭉치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안 되겠다. 그냥 입을 가져다 대는 수밖에. 그때 흙 속에서 소리가 났다. 여자인 듯, 남자인 듯, 묵직한 목소리가 흙의 결을 따라 내 손을 보듬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흙의 작은 입자들이 좌우로 춤을 추었다. 순간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 누구세요?”


“아이야, 놀라지 마.”


“어디.. 어디에 계시죠?”


“나는 흙의 정령, 피세드 테르 아도브야.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피세드라고 부르지.”


“저를.. 아세요?”


“그럼. 아주 잘 알지. 그런데 넌 왜 흙을 먹는 거지?  항상 궁금했어.”


“모르겠어요. 제 마음이 자꾸 흙을 찾아요.”


“전부터 너를 지켜봤어. 곡괭이로 흙을 파헤쳐 부드러운 흙을 찾아 허겁지겁 먹는 널 봤지. 어느 날엔 마당 변소의 회벽을 긁어먹다가 그곳에 웅크리고 잠든 널 보았어. 흙 먹는 걸 감추려고 그랬던 거니?”


“네. 흙을 먹으면 가족들이 싫어하고 화를 내요. 특히 엄마 우르슬라는 때리기도 하고요. 쳇! 친엄마도 아니면서! 이 집에서 진짜 내 편은 없어요. 저는 늘 지독하게 외롭거든요.”


“그랬구나.. 그래도 그건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었을 거야. 네 건강이 염려되었을 테니 말이야. 정확히 어떤 감정일 때 흙을 먹게 되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제 살갗을 뚫고 나오면 저도 모르게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흙 속에 몸을 파묻게 돼요. 처음엔 흙을 만지는 걸로 만족했어요. 엄마 품처럼 포근했거든요. 흙으로 손등을 덮고 둔덕을 만들어도 진정이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몸이 흙을 원해요. 마치 내 존재를 흙으로 바꾸려는 듯 점점 더 많은 흙을 불러요. 저도 무서워요.”


“죄가 죄를, 파도가 파도를 낳듯이.. 흙이 흙을 끊임없이 부르는구나. 네 안에 쌓인 흙이 또 다른 흙을 부르고 있어. 마치 살아서 자라나는 흙처럼 말이야. 그걸 봉합하고 끊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러다가는 제가 흙으로 변해버릴 것 같아요.”


“앞으로는 내가 친구가 되어줄게. 지독한 외로움이 온몸을 휘감으면 언제고 나에게로 달려오렴. 이젠 나를 먹는 대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자. 나를 안고 만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어때? 너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싶어. 그렇게 해줄래?”


“네, 노력해볼게요.”


“아이야, 너는 엄마 없이도 아름답고 재능 많은 아이로, 사랑스러운 아이로 아주 잘 자라주었단다. 지금 네 모습을 보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런 너를 조금만 더 사랑해 주면 어떨까? 너 참 대단하다고, 대견하다고, 잘해왔다고,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렴. 무엇보다 네 몸을 학대하지 말고 아꼈으면 해.  


“고마워요.”


“항상 여기서 너를 기다릴게.”




주민들이 시체를 방에서 끌어내자마자 레베카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세상의 어떤 유혹도 깨뜨릴 수 없는 두터운 수치의 껍질에 싸여서, 스스로 산 채로 집 안에 파묻혀버렸다. (중략) 마콘도는 레베카를 잊어버렸다. (백 년 동안의 고독 149p)


레베카는 유일한 안식처와 같았던 남편이 죽고 난 뒤, 끝내 스스로 집 안에 파묻히는 결정을, 지독한 고독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선택을 한다. 다소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와 레베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얼마나 많이 만져야, 엄마의 젖을 또는 우유를 얼마나 많이 빨아야, 긍정의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야, 얼마나 많은 정서적 교감이 있어야 결핍 없는 아이로 자랄 수 있을까. 만약 정해진 총량이 있다면 그 총량이 다 채워진 아이는 과연 우월할까? 그 총량이 부족한 아이는 무조건 낙오할까? 부족해도 야무지고 단단히 크는 아이가 있을 테고, 넘쳐도 연약하고 부실하게 크는 아이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자라기 위한 최소한의 애정은 기본적으로 채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몸과 마음이 부실한 아이에게 흙과 엄지 손가락 대신 사랑을 주자. 다시 충분히 젖어드는 사랑을 주자.


그래야, 빠진 손톱 그 자리에 사랑이 자란다.



글너머 독서모임, 3월의 책.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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