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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맑음 Mar 28. 2022

흐린 공간이 선명해지는 순간, 그가 내 앞에 있었다.

공간이 흐리다. 문득 잠이 깼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한숨을 내쉬자 몸이 오싹했다. 식은땀을 흘렸나 보다. 꿈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울부짖던 기억만 희미하다. 기분이 아주 별로다. 머리는 무거웠지만 꿈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의식적으로 흐린 공간을 더듬어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시 공간이 흐리다. 이렇게 방이 조용할 리가 없는데.. 그제야 스탠드를 켰다. 딸깍. 신랑이 없다. 12시에 분명 함께 누웠는데, 2시 35분, 그는 침대에 없다. 혹시 내가 화장실에 갔을 때 깬 걸까?


“여보! 여보? 어딨어요?” 


흐린 공간 속에서 내 목소리는 떨렸다. 혹시 마당에 나갔나?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여보! 당신 여기 있어요?”


대뜸 귀뚜라미가 화답한다. 새벽바람이 내 볼을 때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자. 신랑 외투가 있는지, 가방이 있는지 먼저 살폈다. 없다. 그럼 핸드폰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메시지가 지나갔다.


여보, 많이 놀랬지?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마. 주소 하나 남길 테니까 아이들 학교 보내고 여기로 와. 설명해 줄게.


메시지를 보니 이미 작아질 대로 작아진 심장에 공기가 차올랐다. 3시 22분, 잠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이불을 덮었다. 


‘뭘까? 어디 간 걸까? 처음 보는 주소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쌓여갔다.



“엄마! 오늘 아침밥 없어요?”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허둥지둥 아이들 아침을 챙겨 학교에 보낸 뒤, 세수만 간단히 하고 외투를 걸쳤다. 8시 25분, 차에 시동을 걸고 네비에 신랑이 남긴 주소를 찍었다. 주행시간 45분. 심호흡을 함과 동시에 P에 놓인 기어를 D로 바꾸고 엑셀을 힘껏 밟았다. 45분이 4시간처럼 길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휙휙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로 새벽에 거길.. 도대체 왜…’


같은 질문을 100번쯤 되뇌었을 때 도착지점에 거의 다 왔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길이 점점 험해진다. 비포장 길을 덜컹이며 들어가니 산속에 허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녹슨 대문에 덕지덕지 엉겨 붙은 거미줄이 억겁의 시간, 모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낯선 풍경 속 익숙한 차가 눈에 들어왔다. 신랑 차다.


“여보! 나 왔어요. 어디 있어요?!”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문 밖에서 소리쳤다.


“여보! 들어와.” 


신랑이 걱정되어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여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 괜찮아요?!”


신랑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차올랐던 심장의 공기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일단 진정하고 이것 좀 봐봐.” 


신랑이 손가락 마디 만한 유리병을 내밀며 말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홍색 액체에 신비스러운 펄 가루가 둥둥 떠다녔다. 바라보고 있으니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게 뭔데요? 나 왠지 기분이 이상해요. 여기서 우리 빨리 나가요.” 


신랑 손을 잡아끌었다.


“사실은 여보, 요즘 들어 부쩍 당신이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간다며 푸념하고 속상해했잖아. 잠이 안 와서 이런저런 검색을 해봤어. 그러다가 이 기사를 본 거야. 한 방울만 바르면 10년 젊어진다는 기사. 보자마자 주소 치고 정신없이 달렸지. 내가 처음으로 도착했나 봐. 운이 아주 좋았어.”


신랑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여보,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난 좀 이상해. 그런 약이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하필이면 장소가 이런 외딴 숲 속이라는 게 뭔가 찜찜해. 그냥 두고 집에 가요. 여보!” 


신랑을 다시 한번 잡아끌었다. 


“여보, 그러지 말고 어서 한 방울 발라봐. 당사자가 직접 와서 이 장소에서 발라야만 약효가 있다고 해서 당신을 부를 수밖에 없었어.”


신랑이 유리병을 손에 쥐어주며 재촉했다.


“여보.. 만약 부작용 있으면 어떡해요. 꼼꼼하게 설명서 읽어본 거 맞아요? 나 좀 겁나는데..”


내가 망설이자 신랑이 말했다.


“걱정 마.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날 믿어.”


마지못해 얼굴에 한 방울 톡! 떨어뜨렸다.


“당신 얼른 이리 와봐.”


놀란 눈을 한 신랑이 거울 앞에 나를 세웠다.


“헉! 진짜 10년 전 내 모습이네? 주름도 거의 없고, 흰머리도 전혀 없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꿈이야? 생시야?” 


얼굴을 꼬집어 봤다. 아프다. 현실이다. 그제야 약 사용 설명서가 눈에 들어왔다.


맨 아래 빨간색으로 적힌 [주의 사항]을 읽고 나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의사항]
이 약을 사용한 사람은 10년 젊어지는 반면, 이 약을 권한 사람은 10년 늙어지니, 신중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제 10년을 거듭났다.


(끝)



*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주름과 새치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노화에 신경 쓰는 제 모습을 보며 네 명의 아이를 임신, 출산, 육아한 아내에게 미안해하는 신랑입니다. 어디 젊어지는 샘물 같은 약 없나?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다가, 정말 그런 약이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사주겠단 신랑 말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 날 밤엔 꿈까지 꾸었습니다. 윗글은 꿈을 모티브로 각색하여 써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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