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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 Jul 28. 2020

팬데믹 백수의 골방 속 영화 감상

28주 후

코로나19가 만든 '팬데믹'은 모두를 타격했습니다. 


저 또한 그 타격을 피해갈 순 없었습니다. 타격에 의한 데미지가 너무 강한 나머지 집에서 골골대며 스마트폰이나 보고 있으니까요. 과거 쉽게 즐겼던 녹음 속 산책과 맥주 한 잔은 이제 어색하기까지 합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예전에 봤던 영화들을 돌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왜 골방 철학자가 생기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영화를 보자 사회가 보였습니다.


재밌게도 8월 3일이 되면 첫 번째 확진자(2020년 1월 20일 발생)가 생기고 딱 28주째입니다. 현 상황과 비슷한 좀비영화, '28주 후'가 당연 따라왔습니다.


영화 '28주 후'의 포스터


28주 후가 성공한 좀비영화로 불리는 이유는 좀비를 잘 그려내서가 아닙니다. 물론 빠르게 움직이는 좀비, 엄청난 감염 속도 등 좀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온 시리즈로 평가받지만 그것만으로 좀비영화의 '교과서'로 불리긴 어려울 것입니다.


28주 후는 철저히 '개인'과 '국가'의 마찰을 중심으로 표현한 영화입니다. 그것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즉, 철학이 담겼기에 이 영화는 모두의 환호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좀비영화에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 이후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친구와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28주 후의 시작은 모두의 기억 속에 남기 충분했습니다. 좀비의 습격가 습격하고 남편인 '돈'은 아내 '앨리스'를 배신합니다. 그리고 광활한 평야를 뛰면서 나오는 대표 OST! 좀비영화 마니아들의 가슴을 쾅쾅 뛰게 만들었죠.


하지만 '개인'의 선택이 어떻게 모두의 공멸을 가져오는지를 말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바깥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를 받아들이는 결정을 모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앨리스가 감행합니다. 그 결정은 '생존'이란 이유로 느슨하게 결속돼 있던 쉘터 공동체를 무너트립니다. 개인의 잘못된 선택은 작은 공동체쯤은 쉽게 날려버리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술래잡기의 명수들


그렇다면 국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국가는 개인의 선택을 배제하고 안전한 쉘터를 구축해냅니다. 그리고 그 구축을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은 '군사력'입니다.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임의 숙소 배정입니다. 군인들이 쉘터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주거의 자유란 없습니다. 돈의 가족들이 좋은 집을 배정받았으니 다행이지 저처럼 골방에 배치 받았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렇지만 불만을 토로할 순 없었을 겁니다. 생존 앞에 주거의 자유는 사치일 뿐이니까요.


아이러니하게 국가가 계속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개인'이 발견합니다. 바로 돈의 딸과 아들이 국가의 통제에 벗어나 엄마 사진을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 말이죠. 아이들은 엄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공대 마냥 군인의 눈을 피해 위험지역을 향합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라는 강력한 결속의 느슨한 곳, 도일(현 호크아이)은 두 아이를 발견하지만 방치합니다. 딸과 아들은 엄마의 사진을 찾기 위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배달용 오토바이도 훔쳐타면서요. 그런데 사진 속 엄마가 아니라 진짜 엄마를 만나버립니다. 앨리스는 좀비에게 아무리 물어뜯겨도 감염되지 않는 항체를 지닌 자였던 것이죠.


사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욕부터 나오긴 합니다.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서 엄마 사진을 찾으러 사지에 뛰어들어?! 하지만 개인의 선택과 국가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기 위해선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약한 결속체인 쉘터와 달리 국가는 이정도 개인의 선택으론 무너지지 않는 것도 보여줍니다. 멍청한 개인조차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국가인 것이죠. 그렇기에 개인은 국가에 의지하는지도 모릅니다.


중대장은 너에게 실망했다


하지만 국가의 폭력은 과했습니다. 개인을 지키다 못해 무너트리는 결정을 합니다. 좀비들 속에서 살아온 앨리스에겐 따뜻한 환대가 아닌 물대포와 쇠수세미를 선사합니다. 곧바로 의무장교인 스칼렛이 앨리스에게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폭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방역과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바로 덧붙이는 건 국가의 폭력에 대한 사과가 아닌 이해를 구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죠.


국가라는 강력한 결속체에서 개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외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엄마 앨리스는 백신이자 아포칼립스의 희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국가의 문법으로 보니 '관리 대상'일 뿐입니다. 잘 먹이고 잘 쉬게 하는 게 아니라 실험체처럼 묶어놓습니다. 국가에 앨리스는 반항도 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국가라는 강력한 힘을 맹신하는 자에게 뒷통수를 선사하기 위해 앨리스를 너무나도 쉽게 죽여버립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앨리스가 돈에게 물어뜯기도록 만든 건 다름 아닌 국가였습니다.


이후 국가를 유지하는 강한 힘 군사력이 발동됩니다. 지휘관은 쉴 새 없이 퍼지는 좀비와 민간인을 구분하길 포기하고 무차별 사살을 명합니다. 주거의 자유나 앨리스의 수속 과정 등에서 보여줬던 개인 파괴 행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좀비에 물리는 사람보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군인은 총격을 퍼붓습니다. 그러는 사이 개인은 국가에 의해 희미해져갑니다.


술래잡기에 지친 구 도일, 현 호크아이


그렇기에 이 인물이 중요합니다. 국가의 일부이지만 개인을 존중하는 인물, 도일입니다. 좀비보다 군인이 더 무서워질만 할 때쯤, 도일은 국가를 포기하고 개인을 선택합니다. 그는 국가의 명령 하에 희생되는 동료를 보며 더 이상의 사살을 멈추고 돈의 아이들을 보호하러 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를 본 순간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었다고.


사실 도일이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지켰으니 망정이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지키러 내려갔다면 영화의 흐름은 달라졌을 겁니다. 만약 도일이 코로나19 속 방에 박혀있는 저를 구하러 왔다면 그는 멋있는 군인이 아니라 국가의 명령에 반하는, 소위 '뻘짓'하는 바보 군인으로 묘사됐겠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국가의 의식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당하지만 않는다면 국가의 폭력을 쉽게 용인합니다. 도일은 그 아이가 백신인지도 모른 상황에서 '아이'라서 구하러 갔습니다. 우리가 도일을 '백신의 수호자' '공동체의 수호자'가 아닌 '개인의 수호자'로 봐야 할 이유입니다.


느슨한 간격을 두고 걷는 개인들


이후 개인으로 구성된 느슨한 공동체는 다시 생성됩니다. 도일, 스칼렛, 아이들, 그리고 어중이떠중이들까지 함께 도망 다닙니다. 이들을 쫓아오는 건 좀비가 아닙니다. 잠깐 좀비에 감염된 아빠의 환상이 보이긴 하지만 이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건 국가, 즉 군사력입니다.


무차별 폭격, 가스, 소각 등 국가는 모든 폭력수단을 활용합니다. 그러면서 개인의 수호자 도일은 산화하고 맙니다. 그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차에서 내려 밀다가 죽습니다. 좀비가 아니라 군인에 의해서 말이죠. 좀비영화인데 개인에게 더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건 국가라니... 영화의 메시지가 명확했습니다.


QR코드를 찍어야만 다닐 수 있는 현 상황 / 출처: 연합뉴스


자연스레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과 비교됐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생긴지 28주째, 우리는 국가의 감시에 무뎌지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유흥업소를 시작으로 병원, 야구장까지도 QR코드를 찍어 개인의 이동동선을 파악하는 건 솔직히 개인에게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국가는 철저히 개인정보를 관리한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 누가 보호구역이 좀비에게 뚫릴 거라 생각했겠습니까? 확진자 중 동선을 숨기려는 자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보장된 사생활을 향유할 자유이니까요.


뉴욕타임스는 코로나19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자들의 부고를 실어 국가의 무관심에 경고장을 날렸다 / 출처: 뉴욕타임스


그렇다고 개인의 선택을 그냥 지켜보는 것도 답은 아닙니다. 그 어디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은 7월 26일 기준 확진자 수가 400만 명을 넘어선지 오래입니다. 절대적 자유는 지켰을지 몰라도 일을 할 자유, 여유롭게 휴식을 할 자유, 혹은 생명을 지켜나갈 자유 등 실질적 자유는 잃었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의 가족들은 개인으로서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욕을 하거나 갑갑해 합니다. 하지만 내가 그 곳에 떨어진다면, 언제나 합리적인 개인으로서의 선택을 할까요?


국가가 항상 옳다는 건 아닙니다. 개인 역시 옳다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답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28주 후'가 재밌는 영화인 것 아닐까요?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 좋은 영화의 조건인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를 봤다면 안 좋은 영화도 봐야죠. 좋은 것만 봐서는 세상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것도 경험해야 면역이 생기고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 영화는 '28주 후'와 비교되는 좀비 영화를 보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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