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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 Nov 27. 2022

평범한 직장인의 골방 속 영화 감상: 아무도 모른다

방치된 아이들, 사회로부터 타살당하다

'아무도 모른다' 포스터


11월이 막바지를 향하는데 날은 여전히 따뜻합니다. 사람들은 그닥 두껍지 않은 옷을 입고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한 달이나 남았는데 나무들은 벌써부터 노란색 전구를 몸에 걸쳤습니다. 연말이 가까워졌다는 게 실감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포근한 기운이 오래 가지 못할 듯 합니다. 내일 비가 오고나면 역대급 강추위가 찾아온다고 하네요. 추운 날씨를 견뎌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이 추위가 다르게 온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좀 쌀쌀하지만 예쁜 패딩을 입을 수 있는 날씨라고 보지만 누군가는 생명과 직결되는 순간입니다. 스스로 경제력을 가질 수 없는 노인이나 아이들이면 더더욱 괴로운 계절이겠죠.


여기 어른의 보호 없이 4계절을 견뎌낸 네 아이를 다룬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88년 일본에서 한 어머니가 어린이 4명을 아파트에 두고 도망간 '스가모 어린이 유기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어른들과 사회가 아이들을 방치할 경우 얼마나 잔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영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후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릴러인 줄 알았다.

이야기는 엄마(유)와 첫째 아키라(야기라 유야), 둘째 교코(키타우라 아유), 셋째 키무라 히에이(시게루), 넷째 유키(시미즈 모모코)로 구성된 5인 가족이 한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시작됩니다. 엄마는 집주인에게 12살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아키라만 보여주며 별 소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일본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참아줄 정도로 여유가 없다는 사회임을 보여줍니다.


전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행동을 막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가족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짐가방에 숨겨 이사 온 엄마는 마음을 콩밭에 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 제2의 삶을 꿈꾸는 거죠. 아이들은 엄마의 도망을 직감합니다. 아키라는 엄마에게 "새 남자에게 우리 존재에 대해 말했어?"라고 묻죠. 엄마는 무시하고 오르막인 계단을 오릅니다. 한 차례 돌아보지도 않고 말이죠. 그리고 식당서 아키라에게 말합니다. "엄마는 행복하면 안 되니?" 엄마에겐 짐가방에 숨겼던 이 아이들이 정말 짐이었나봅니다.



엄마가 많은 돈을 아키라에게 남기고 새 남자에게 도망간 이후 아이들의 삶은 180도 바뀝니다. 이전 형편도 넉넉치는 않았지만 배를 곯고 못 씻지는 않았으니깐요.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돌아온다던 엄마가 1월을 지나, 봄, 여름을 지나서까지 오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말 그대로 부랑아가 됩니다. 편의점에 가서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도시락을 얻어먹고 공원에 가서 물을 훔쳐다 씁니다. 시게루는 혹시나 동전을 주울 수 있을까 싶어 공중전화를 지나갈 때마다 살펴봅니다.


아이들은 무기력합니다. 울 힘조차 없습니다. 겐코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엄마 옷이 가득 찬 옷장에 들어가 숨어있습니다. 시게루와 유키는 더위에 지쳐 누워만 있습니다. 아키라는 떨어져가는 잔고를 보면서도 울지도 않습니다. 한숨을 쉰다거나 짜증도 안 냅니다. 그조차 사치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의젓해보이던 아키라도 알고 보면 철들지 않은 어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놀 땐 여느 초등학생과 비슷합니다. 부랑아라는 이유로 친구들이 멀리 하자 "새 게임기 샀는데 우리 집 올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키라도 사랑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어디 아키라만 그럴까요. 겐코와 시게루, 유키도 울지 않을 뿐 엄마가 보고 싶고 눈물이 날 겁니다. 이 영화는 눈물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이 상황을 더욱 잔인하게 느끼도록 합니다.


오빠인 아키라가 사준 초콜릿을 아껴먹던 유키


이야기는 유키의 죽음으로 방점을 찍습니다. 유키는 흔들거리는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죽고 맙니다. 사실 진작 벌어졌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유키뿐만 아니라 4명의 아이들 모두 흔들의자 위에 있듯 불안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기괴함으로 가득합니다. 아이들은 울지 않고 유키의 시체를 이사 올 때 썼던 짐가방에 담습니다. 아키라와 친구 사키(칸 하나에)는 유키의 시체를 들고 하네다 공항으로 옮깁니다. 시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캐리어를 덜덜 끌고 갑니다. 지하철에서도 시체와 함께입니다. 어른들은 커다란 짐가방을 옮기고 있는 작은 체구의 아키라에 관심 없습니다.


아키라는 하네다 공항에서 유키를 묻으면서도 울지 않습니다. 다만 손을 덜덜 떠는 장면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겨우 12살인 아키라가 이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떨고 있는 아키라의 손을 잡아준 것은 어른이 아닌 친구 사키였습니다.


전혀 울지 않던 아키라. 무기력한 아이들을 만든 건 어른들이었다.

유키는 사실상 사회적 타살을 당했습니다. 가장 큰 책임은 아빠'들'일 겁니다. 엄마와 성관계를 맺었던 남자들은 "유키는 날 닮았니?" "나는 분명 피임했다" 등 책임지는 것과 거리가 먼 말만 했습니다. 돈이 없어 굶고 있는 아키라에게 그저 지폐 몇 장만 줄 뿐이었죠. 엄마와 인연이 됐던 남자 단 한 사람이라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였다면 유키는 흔들거리는 의자에 올라가지 않았을 겁니다.


엄마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엄마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짐덩이인 아이들을 아파트에 내팽겨치고 도망갔습니다. 반기마다 한 번씩 돈을 부쳐주지만 그것으로 아이들은 의식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합니다. 쾌락만 알 뿐 책임질 줄 몰랐던 엄마는 몸만 어른일 뿐 정신연령은 아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아키라보다도 못할 수 있겠군요.


다른 어른들도 책임이 있습니다. 집주인은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는 겐코와 시게루, 유키에 별다른 관심 없습니다. 그저 친척이란 말에 '그렇구나'하고 말 뿐이죠.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지 않아 집에서 냄새도 났을 건데 찾아가보지도 않습니다. 집세가 한참 밀리고 나서야 집에 찾아가죠. "엄마가 어딨니?"라고 물을 때 아이들은 "출장 갔어요"라고 답합니다. 역시 집 안은 쓰레기로 가득하고 아이들은 방치돼 꼬질꼬질한 상태였지만 집주인은 뒤돌아서고 맙니다.


편의점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초콜릿을 무더기로 사고 있는 아키라에게 "소풍 가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아키라 역시 씻질 못해 냄새나고 먹질 못해 빼빼 마른 상태였을 건데 말이죠. 그는 아키라의 영양상태 등에 관심 가지기보단 편의점 물건을 훔치는지 더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방치된 아이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돼 있습니다

영화보다 현실은 더욱 잔인합니다. 앞서 언급한 스가모 어린이 유기 사건에서 실제로 4명의 아이들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막내 딸은 첫째와 어울렸던 비행청소년들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막내 딸이 사망했을 당시 나이는 두 살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엄마는 다른 남자를 따라가면서 아이를 방치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았고요. 아빠는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대출 받고 흥청망청 살다가 어디론가 도망갔습니다. 부모들이 책임에 대해 눈 감고 있는 동안 막내 딸은 비닐봉지 안에서 썩다가 땅에 파묻혔습니다.


'정인이 사건'의 양모 장모씨

우리나라라고 다를까요.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후 16개월에 불과한데 학대 끝에 사망한 정인이, 계모가 가방 안에 가둬 사망하고 만 아이도 있습니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아동학대건수는 3만905건에 달합니다. 이는 5년 전인 2015년(1만1715건) 대비 3배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신고가 어려운 특징을 고려하면 아동학대건수는 더 많을 것이라 예상 가능합니다.


범죄를 떠나서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지킬 준비가 돼 있을까요? 스쿨존에서의 교통사고를 가중처벌하는 '민식이법'이 제정되자 어른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과잉 처벌이다" "이렇게 못 달리면 자동차를 타는 의미가 뭐냐" 등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린이 보호보다도 어른들의 편리함이 더욱 중시되는 사회입니다. 참고로 최근 10년 동안 어린이 교통사고 사상자 수는 14만1552명에 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100년이 지났는데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개선됐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이 사회 어디선가, 쓰러져가는 집에서 차가운 외풍도 힘든데 어른과 사회의 폭력을 견디는 아이들이 있을 겁니다. 부디 무력하지 않게, 잘 버텨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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