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성격장애, 비정상, 정신병자.
며칠 전 술자리에서 연인이 생긴다면 자신의 고통의 역사를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무심코 나는 연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중한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보다, 내가 소중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더 슬프고 외롭고, 소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막상 그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는데, 다음날 종일 생각해 보니 답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하고 편해서 선택하는 몸의 기호와 내 신념이 그리로 향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영혼의 기호를 분리할 수 있다면, 내 두 기호는 서로 어긋나 있다. 내 타고난 몸은 아무 이유 없이 향상심을 지향한다. 반면 내 신념과 가치관은 다정함을 향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다정함은 다른 존재의 아름다움과 나약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 신념과 가치관이 왜 그렇게 세팅되었는지를 계속 고민해 보니,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한 사람과의 관계에 있었다. 이 사람은 나와 가장 깊이 교감했던 친구이자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다.
고등학교 선택 과목 시간에 우연히 J가 내 옆에 앉았다. 수업 시간이 지루했는지 나에게 필담을 걸었는데 우리는 놀랄 정도로 죽이 잘 맞아 금세 친구가 됐다. J는 머리가 비상하고 고등학생답지 않게 인생관이 뚜렷하고 견문도 넓었다. 외고에서 유일하게 미대 입시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강단과 근성을 갖춘 괴짜로 여겨졌고, 말과 행동, 취향에서 묻어 나오는 귀한 집 아가씨 느낌 때문에 여러모로 눈에 띄었다. 이렇게 특출 난 사람이 나를 좋게 본다는 사실에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J가 쉬는 시간마다 내가 있는 교실로 오는 일이 잦아지고 내 다른 친구들을 견제하는 말을 하자 나는 그 애를 부담스럽게 생각했고, J 쪽에서도 눈치를 챘는지 점차 나와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사이가 소원해지고서 J와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 애는 명문대 미대생이 되어 있었고 전보다도 더 멋진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당시 힘든 일을 겪었던 나한테, J는 그림을 그리면 머리를 비우기 좋다며 그림 과외를 제안했다. 그걸 계기로 우리는 함께 이곳저곳을 쏘아 다니고, J의 자취방에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J는 내가 받아본 적 없는 정도의 깊은 애정을 주었다. 내가 그만큼 되돌려 주지도 못했는데, 그 애 앞에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어린이가 된 것 같았다.
둘이서 가까이 붙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알게 된 건, J는 타인의 행동이나 표정, 말을 조금만 지켜봐도 독심술을 하듯이 그 사람의 의도나 생각, 성격을 맞추어 낸다는 점이다. 이때 J와 나의 정신연령은 최소 애늙은이 나르치스와 막 수도원에 들어온 골드문트 정도로 차이 났고, 또 둘이 붙어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애는 나에 대해 꽤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남이 내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 내 삶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내면에 요새를 세워두고 숨어 버린 사람의 속내를 알아채고,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고 표현해 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내가 너한테서 뭘 봤고, 뭘 했는지 넌 모를 거야.”라는 J의 말의 의미를 지금은 안다. 밖으로 뻗어 나가길 원해도 거의 말라 붙어서 그럴 수 없던 수원에, 외부에서 물을 보태서 결국 흘러넘치게 만들고 싶었던 거다. 자신이 준 다정함을 언젠가 되돌려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비록 그 자신이 노력의 대가를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그 애의 시도는 결국 성공했다. 지금의 나는 상처를 쉽게 받고 잘 울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조금은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난 후, J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거기서 역겨운 악취가 나. 울어 본 지 5년은 된 것 같아. 더러운 늪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어. 정신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나를 말없이 껴안아 줬으면 좋겠어.
왜 그런 말을 해?
너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 못 할 테니까 말 안 해.
그 말대로 나는 J의 시니컬함과 우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각자의 삶에 채널이 있다면, 내 삶은 조금 어두워지거나 진지해질라치면 곧 경쾌함으로 반전되는 코미디 채널, 그리고 밀물과 썰물이 영원히 반복되는 해변가가 비추는 채널, 이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J의 삶은 공포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J는 온갖 것들이 악의를 가지고 자신을 공격하는 지옥에서 살고 있고, 이건 당시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정작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건 가슴 조여드는 통증을 느끼게 한다.
어느 순간부터 J는 내게 도덕적인 훈계를 많이 하고 내가 현재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 있고, 자신이 도와줄 테니 노력해서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발작하듯이 너는 쉽게 타인을 버릴 무정한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그 비난의 주기는 점차 짧아졌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던 사람에게 인격에 대한 비난을 듣는 건 저항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J에게 늘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고 최선을 다해 항변해 봐도, 자신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내 지적에 의해 J는 자신이 산산조각이 나서 살해당하는 것 같다고 호소하고, 나는 또 죄책감이 들었다. 이제 나는 J가 인간이 아니라 진흙으로 된 괴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애가 모진 말을 할 때마다 검고 악취 나는 것이 내 안에 흘러들어 왔고, 그 애가 없을 때조차 나는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사라졌다. 함께 쓰던 공용 드라이브에 음악 파일 하나가 남겨져 있어 들어 보았지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곧 꺼버렸다. 그때의 기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2년이 지나서였다. 우연히 경계선 성격장애에 관한 책을 읽었다. 경계선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연인이나 가족으로 둔 사람들의 경험담을 적은 책이었다. 책을 읽고 하루 종일 울었다. J가 보인 언행들, 그 언행으로 인해 내가 느꼈던 감정들, 미대생인 그 애의 책상에 왜 정신병리학 책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두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J한테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라는 꼬리표를 붙이자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J가 나를 환자이자 비정상인으로 대상화하고 자신은 정상인이 되어 내게 폭력을 휘둘렀듯이(*아마 그 애는 자신이 지닌 결함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서 의사의 위치를 선점하려 했을 거다. 그래서 여느 경계선 성격장애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치유해 줄 사람이 아닌 자신이 치유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맸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애와 정확히 똑같은 방법으로 그 애를 굴복시켰다. J가 치료받아야 하는 동정의 대상으로 규정되는 순간 내 기억 속의 그 애는 한없이 약해졌고 반대로 나는 강해졌다. J가 나한테 들이부었던 나 자신의 부도덕성에 관한 혐오도 상당 부분 걷어낼 수 있었다. 정상인 나는 옳고 비정상인 J는 틀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J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J의 고통은 책에 이미 설명된 무언가로 분류되었고, 동정과 연민은 할 수 있을지언정 내가 공감하고 이해해야 할 무언가는 아니게 되었다.
비정상, 정신병자, 경계선 성격장애, 이런 꼬리표가 얼마나 튼튼하게 나를 보호해 주던지. 하지만 그 후로도 끊임없는 의심이 일어났다. J의 병명과 병에 관한 설명이 내가 겪은 그 애를 정말로 다 말해주는 것이 맞는지… 정말로 그 애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실제의 나와 전혀 다른 이상화된 이미지를 나에게 덮어씌웠나? 그 애가 나에게 준 모든 애정은 그저 버림받지 않으려는 정신병자의 공포에 찬 몸부림이었나?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내가 내린 결론은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거다. J가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 등을 붙이고 같이 키득거렸던 그 순간들, 그 애가 호소하는 고통을 저런 단어들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서른 살 즈음에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다가 J가 남긴 음악을 다시 들었고, 그 애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연락은 닿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동생이 공황장애로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동생은 생각이 깊고 어른스럽다는 점이 J와 닮았고, 가끔 자기를 껴안아 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아주 사소한 공통점이지만, 그 때문에 나는 사실 J는 죽었고, 그 애는 죽는 순간 아주 잠깐 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J의 진흙 일부가 내 동생을 통해 나를 보러 왔다고 상상한다. 이번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다정할 수 있을 정도로만, 내가 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만.
친구야 안녕 그리고 행운을 빌어
“너 올 거지?”라고 그녀는 나에게 물었지
난 갈 것인지 안 갈 것인지 알지 못했어
하지만 내가 언젠가 그곳에 있었으면 해
행복했던 그 시절들을 돌이켜 보며
우린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했지
우린 밤 내내 깨어 있었지
네가 떠나가면 난 널 무척이나 그리워할 거야
나도 너와 그곳에 있고 싶어
내 꿈이 언젠간 이루어질 거야.
그래 괜찮다고 생각해
그녀는 아무런 실수 없이 잘할 거야
난 행복했던 날들을 생각했어
내가 우리의 꿈속에 있었을 때 말야
그때 또 만나자
친구야 난 네가 행복하기를 빌어
예전의 행복했던 그 시절들을 뒤돌아보며
난 내 눈이 마를 때까지 울었어
난 네가 그리울 거야
그래, 아마 괜찮을 거야
그녀는 실수 없이 잘하고 있을 거야
난 그래도 괜찮을지 궁금해
내일은 괜찮을지 궁금해
안녕 그리고 행운을 빌어
나도 그곳에 가고 싶어
다음에 또 만나자
난 행복했던 날들을 생각했어
내가 우리의 꿈속에 있었을 때 말야
그때 또 만나자
안녕 그리고 행운을 빌게
난 끝까지 너와 함께야
다음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