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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O May 12. 2023

직업으로서의 작문 노동자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하루키에게 관심을 둔 적은 없었다. 고등학생 때 읽은 해변의 카프카, 상실의 시대에서 나오는 일본 현대소설 특유의 덤덤충 캐릭터가 그다지 내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구질구질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쿨하지 못한 인물을 좋아한다.) 최근 감명 깊게 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카」가 하루키 소설을 원작으로 삼는다는 것을 듣고서 조금 놀랐고, 원작 소설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류스케 감독의 따뜻한 인류애 필터로 각색되었기 때문에 그 영화가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겠거니 하고 그만두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 본인의 소설보다도 내 흥미를 끌었는데, 그 책 속에 드러난 작가의 인물상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20대 때 뭐가 됐든 돈을 번다는 마인드로 인내하며 일하고, 30년간 매일같이 유산소 운동을 하고, 남이 자신의 초고에 대해 흠을 잡으면 ‘일단 고친다.’라고 생각하는 소설가라니! 굉장히 건실한 어른 아닌가.



이 책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 즉 내 직업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국어 모의고사를 만드는 연구소에서 비문학 글을 쓰고 있다. 생각해 보면 글 쓰는 일을 선택한 건 내 의지는 아니었다. 입사 당시, 나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각각 국어 교육과 동양 철학을 전공한 백수로 뭐든 좋으니 돈을 벌고 싶었고, 연구소에선 공부를 중단한 동양 철학 전공자이면서 동시에 나이는 적은 희귀종을 찾고 있었다. 야구공이 손에 떨어지는 기막힌 계시도 없이, 어쩌다 보니 나는 작문 노동자의 링에 올라가 버렸다.



내가 오른 링은 소설가의 링과 전혀 다르다. 나는 한참 전부터 이번 생에 내가 소설가가 될 가망이 없다고 결론 내렸었다. 중학생 시절 세계 문학에 푹 빠져서, 방학 한 달 동안 독서실에서 습작을 써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겨우 A4용지 2장 정도에 해당하는 조잡한 글을 만들었다. 서사라곤 없이, 그저 피상적인 인상들만 늘어놓은 망작이었다. 그리고 책이라곤 거의 읽지 않는 친구가 30페이지 분량의 그럴듯한 단편 소설을 뚝딱 써내는 걸 보고, 난 소설가의 길을 빠르게 손절했다.



나는 왜 소설을 전혀 쓰지 못했을까? 이 책에서 하루키는 겸손하게도 똑똑한 부류의 인간은 소설가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루키도 말하듯이, 그런 류의 인간도 소설 한 편 정도는 써 본 후에 소설가의 링을 떠난다. 내가 내린 결론은, 얼마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와 별개로, 가상을 창조해 내려는 충동이 적은 사람은 절대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이전에는 없는 방식으로 조합하고 자신만의 허구를 상상하여 세상을 향해 분출하려는 충동, 소설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하루키가 말하는 지속력이나 덜 똑똑함(?)은 어디까지나 그다음의 문제라고 본다. 아마도 하루키는 소설가의 링 위에 오른 인간을 주로 보았기 때문에, 애초에 소설가의 링에 오를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언급을 삼갔던 걸 수도 있다.



요행히 나한테도 특수한 분야에 한해서 글쓰기의 재능이 있다. 어떤 내용을 명료하게 요약하거나, 어떤 글이 가진 논리적 허점을 발견해서 비판하거나, 혹은 글이 가진 허점을 보완하여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재구성하는 재능이다. 굳이 따지자면 책의 5장에서 소설가의 비교항으로 등장하는 평론가, 저널리스트, 학자적 글쓰기 방식 말이다.



내가 쓰는 글은, 원래라면 일반인들도 알아먹을 수 있게 풀어쓸 필요가 없는 학술적 내용을 억지로 심플하게 재작성하는 글이다. 비유하자면 소설가들의 글쓰기는 평지에 자신이 상상하는 아름다운 집을 만드는 예술적 건축이다. 반면 내가 하는 글쓰기는 기존의 100층 빌딩을 해체한 후, 해체된 재료 중 쓸만한 것들을 활용해 유사한 형태의 30층 빌딩 미니어처를 만드는 재활용 공예이다. 여기서 내 상상력과 창의력이 발휘되는 부분은, 어떤 이론의 논리가 현대적 관점에서 비약이거나 지나치게 비상식적일 때 상식인이 납득할 수 있도록 마사지하는 부분 정도이다. 내 입장에선 약점은 드러나지 않고 장점만 뽐낼 수 있는 링에 오른 셈이니까 참 다행스럽다. 



또 다른 글쓰기의 재능을 굳이 찾자면, 딱딱하기가 쉬운 학술 분야의 글감 중에서 학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소재를 포착해서 재밌게 써내는 재주가 있다. 이건 아마 내가 흥미본위의 인간이라, 애초에 스스로가 몰입할 수 있는 소재에 관해서만 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읽고 싶은 자료를 잔뜩 수집해서 쿰척,,, 쿰척,,, 거리며 글을 쓰다 보면 읽는 사람들에게도 오타쿠의 열정이 전달되는 모양이다. 회사 시스템 상 연구원에게 주제 선택권이 있기에 내 흥미에 맞는 글을 쓸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입사 이후 내가 주로 쓰는 글은 동양 철학보다 예술, 미학 분야에 치우쳐 있다. 가끔 회사 임원이 AO 씨 요즘 왜 동양 철학 글 안 써? 하고 눈을 흘기지만 어차피 미학 글 쓰는 사람도 나 말고는 없어서 배 째슈,, 하고 있다. 공부를 그만둔 지금, 내가 이후의 삶에서 동양 철학을 어디 써먹을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동양 철학 지식으로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 무협 소설 쓰기 외에 더 폼나는 게 있다면 제발 나한테 알려 달라.), 예술 쪽 지식이 있으면 적어도 전시회나 음악회 같은 취미 생활 즐기는 데에 더 유리하다. 그리고 체감 상 동양 철학을 잘 아는 것보다 예술이나 미학에 정통한 게 사람들 눈에 더 ‘있어 보이는’ 것 같다. 



이렇게 즐거운 덕업일치 인생을 보내고 있는 내게도 고민은 있는데, 오리지널리티에 관한 것이다. 회사에서 쓰는 글은 기본적으로 이미 누군가가 쓴 내용을 재작성하는 글이라 내용 측면에서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문체라는 표현적 측면에서도 오리지널리티의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쓰는 글은 작품이 아닌 상품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적 피드백을 받고 그것을 반영한다. 또 수능 평가원 기출이라는 모범적 글에 맞추어 단어나 문장 구조의 선택, 문단 구성 방식, 문장 간의 연결 방식을 조작한다. 이렇게 망치질이 과도하게 들어가는 글쓰기 조건 때문에 문체에서 우러나는 풍미가 제거되고 모든 연구원의 문체는 획일화된다. 대략적인 글쓰기 과정은 이렇다. 거대한 빔프로젝터를 쏜 다음 회사 임원들이 마치 레닌모 쓴 동지들이 소비에트 연설문 작성하듯이 다 같이 내 글을 검토한다. “말했다는 좀 기세가 약하고 역설했다는 어떨까?” “오, 고치니까 꽤 괜찮은걸?”이런 식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내 글을 고치고 되돌렸다가 다른 단어로 고치기를 반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개성은 날아간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 내 글 솜씨와 지금의 글 솜씨를 비교하면, 분명히 지금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하는 글쓰기의 업이 나에게 잘 맞고 글쓰기 관련 직업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고민이 든다. 만일 내가 회사를 그만둘 경우 오리지널리티 없는 작문 노동자로서 링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루키가 말하는 ‘살아남는 작가’들처럼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 필요한 것 아닐까?

내 직업 상 당장 문체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아마 문체에서 내 특징을 드러내려고 하면 바로 임원진에게 일 똑바로 하라고 두드려 맞을 것이다. 대신 내용 측면의 오리지널에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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