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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Dec 12. 2023

고급 노비 지망생 말고

《같이 가면 길이 된다》 리뷰


같이 가면 길이 된다

저자 이상헌

출판사 생각의힘

출간일 2023.04.07

페이지 320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사망 5주기가 지났다. 청년 비정규직, 하청 구조, 안전불감증 등 우리 사회 노동 구조의 열악함을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인 산업 재해 사망 사고로, 후에 ‘김용균법’이라고 부르는 개정안의 계기가 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이 컸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사고 당시와는 달리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옅어졌다. 대법원이 관련 책임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이 책을 다 읽고 문득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보다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2010년대 즈음 나는 노동 문제에 지금보다 훨씬 관심이 많았다. 노동의 부조리를 알리기 위해 직접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쌍용자동차 부당 해고 노동자의 고공 농성 기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노동자 인권을 위해 시위를 해 온 과거의 사람들에게도 부채감을 느꼈다. 지금 대부분 주 5일제로 일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의 행동이 있었던 덕이다. 정작 그 수혜자인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무관심하다는 아이러니에 화가 났던 기억이 있다.

십 년 정도가 지난 지금, 《같이 가면 길이 된다》를 사두고서는 읽기를 계속 미루는 나를 발견했다. 한국의 노동 실상을 다룬 책을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편에 있었다. 나는 특별한 행운이나 기회가 없는 한 여건이 될 때까지 일하며 살아야 가능성이 크다. 노동의 의미를 나 자신의 생계를 위한 활동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나에게는 부조리의 확인사살과 다름없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다. 우리 사회의 김용균들을 너무 많이 목격하면서 오히려 무뎌지고 나도 모르게 자포자기 모드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셈이니까.


초반 1부와 2부에서는 일터의 죽음과 노동권의 변화에 대해 다룬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노동권을 위해 우리가 어떤 여정을 거쳐왔는지, 지금은 어떠한 상황인지에 대해 짚어낸다. 줄곧 외면하고 있었던 처참한 노동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먹고 살려고’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아이러니에 우리는 얼마나 무감각해졌는지. ‘위험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개인의 부주의로 사고는 언제든 날 수 있으니까’ 같은 공허한 이유로 무뎌진 감각을 얼마나 합리화해 왔는지. 당장 자신의 생계와 미래가 걱정되는 소시민들에게 다른 노동자들의 처절한 위험 부담은 이런 식으로 관심 밖이 되기 십상이다. 이 책은 어느새 무뎌졌던 나의 부채감을 상기시켰다.


중반 3부와 4부에서는 주로 노동을 둘러싼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능력주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줄 세우기’나 자기와 주변의 몫만 챙기느라 남을 차단하려고 하는 ‘울타리 치기’라는 개념이 인상적이었다. 1-2년 전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바람을 타고 IT업계 붐이 일었을 때 ‘네카라쿠배(당토)’ 같은 말이 자주 쓰였던 적이 있다. 각 업계별 기업 계급도(?) 이미지가 인터넷에 떠돌았던 것도 기억한다. 이런 줄 세우기는 비단 기업 평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기업이나 대학 줄 세우기는 물론이고, 아이돌도 투표로 순위를 매겨서 데뷔시키고 소위 명품이라 부르는 고가 브랜드에서도 계급을 따지고 아파트로 계층화하고 결혼정보회사의 등급 기준을 대놓고 이야기한다. 인간 스스로 등급 시스템에 귀속되려고 한다. 나는 이런 줄 세우기 기조가 못마땅하면서도 한편 내가 바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런 세태에서는 줄 세우기가 뭐가 나쁘냐는 의견이 많다. 노력과 능력으로 얻은 것이니 이득을 얻는 것이 합당하다는 논리다. 능력주의에는 크게 두 가지 결함이 있다. 첫째, 노력이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환경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학업을 해야 하는 대학생과 부족함 없는 용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의 시작점은 전혀 다르다. 둘째, 만약 환경이 동일하다고 해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와 능력이 맞는지 여부는 랜덤이라는 점이다. 대학의 선호 학과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마이클 샌델이 ‘랜덤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심지어 코로나를 겪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큰 변화와 충격을 맞았다. 타격은 주로 취약 계층에 집중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생긴 대규모 실업의 대부분은 저임금 저숙련 직종이다. 책에 따르면 세계 전체 평균 기준 고용감소 규모가 고숙련 직종은 이상 없는 수준, 중간 숙련 직종이 5퍼센트, 저숙련 직종이 10퍼센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불평등 바이러스’ 팬데믹의 세계다.


예전에 동료에게 ‘일하면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동료는 황당해했다. 거창한 게 아니라, 단지 내가 가진 적성으로 조직이나 세상에 조금이라도 플러스인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공헌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는데. 그렇게 만들어낸 가치로 생계를 위한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다. 나에게 있어서 노동의 의미는 이러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서 취업에도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고 약자일수록 고용불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노동자 착취적인 구조 속에서 능력을 갈고닦아 조금이라도 고급(대감집) 노비가 되려고 발버둥친다. 요즘 오피스가 근처 카페에 퇴근 후 공부하는 회사원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 또한 그중 하나다. 더 좋은 노동 환경을 찾아 업무 능력을 키우고 자기개발을 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 가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익숙해지고 매몰되다 보니 노동 구조의 틀 자체를 바꿔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불평등한 노동의 모습들이 존재하고 영향이 크지 않은 것 같아도 그건 틀림없이 나를 ‘노비’로 존재하게 한다. 더 좋은 조건의 노비가 되는 데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노동자가 노비로 치환되는 현 노동 구조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면 결국 인생 최대한의 성공이 ‘고급 노비’인 삶이 될 것이다. (심지어 나는 고급 노비조차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 계급이라는 틀이 ‘나다움’을 옥죄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꿈꾸면 황당무계한 걸까. 이 책 제목을 이쯤에서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같이 가면 길이 된다. 같이 가준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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