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목 Aug 18. 2022

아름답지 못한 낙화

삶의 계절에 뒤섞이고 싶지 않다


시원스러운 장마가 끝났다. 날도 제법 선선하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여전히 여름의 잔향이 스며들어 있기는 하지만. 매섭던 여름이 흔적으로 남아 있으니 좋다. 여름의 어스름. 이내  사라질 시간만 앞두고 있으니.


지금의 우린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삶은 흔하게 사계(四季)에 비유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결코 자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잘라내서. 일년의 단위로 자르고 그 일년을 기어코 네 개의 계절로 절단 한다. 그리고 평가와 확인이라도 받고 싶다는 듯 우리가 서있는 계절을 헤아려 본다. 우리가 왜 지금 힘든지, 힘듦의 이유를 그렇게라도 찾고 살아가고 싶어 그렇다.


이 어리석을 수도 있을 헤아림은 특별한 나이를 타지 않는다. 아플 수 있는 것은 청춘이니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나이든 노인까지.


구태여 우리네 인생을 나누어 본다면 봄(春)은 태어나서 부터 고등학교 때 까지가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삶에 열매를 맺을 씨앗을 심는 시기. 그렇다고 해서 꼭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법이니 그렇다.


여름(夏)은 성인이 되면서 부터 시작된다. 뜨겁고도 치열한 삶에서 꿋꿋하게 살아나는 방법과 버텨가는 시기. 이 시기엔 삶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 진리로 여겨질 만큼 우리는 호되게 당한다. 일, 사랑, 사람, 경제력. 이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힘든 것들을 겪어야 하는 현실을 원망하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후회한다.


우리는 밟히면 밟힐 수록 자라내는 잔디같음을 알고 있다. 힘겹지만 이겨내려 노력한다. 그러니 우리는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내는 것에 가깝다. 좌절의 늪에 절여져 네 발로 기어다니다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그 모습을 보는 스스로는 구차한 모습에 이렇게까지 해서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짓밟히고 생채기를 얻으면서 굳세진다.


아직 오지 않은 가을(秋)을 완벽하게 가늠할 능력은 내게 없다. 계절이야 돌고 돌아 다시 오고 가기를 반복하니 예상 할 수 있지만 삶의 계절은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다른 이들의 계절을 보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어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가을의 시작은 낙화와 함께한다. 그러니 우리 삶에서는 이루었던 것들과 멀어지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빠의 정년퇴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말은 아빠에게 가을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온 집안이 아빠의 상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아빠가 좀 힘이 없어진 듯 하네. 전화해서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 드리렴.”


얼마 전, 엄마가 나에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나도 알고있었다. 그리고 주워듣고 봐왔던 것들을 통해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평소에 그렇게 본인을 아끼고 미래를 대비하는 습관을 지닌 아빠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온 가족들의 신경이 아빠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밖으로 티가났기 때문이다. 예상과 현실은 역시나 다른가보다.


그러나 나는 따뜻한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삶의 계절엔 계절마다 겪게되는 힘듦이 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후회할 수도 있다. 힘들 때 힘이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의 가을을 맞아 피워낸 꽃이 아름다웠다고. 낙화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마음은 없다.


이런 결심을 한 이유는 삶의 사계중 여름을 지나고 있는 나이기에 그렇다. 이 뙤약볕 같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위로 받은 기억 한 번 없는 삶. 가위로를 받기보단 늘 질책과 힐난의 대상인 삶. 그게 가족 안에 자리잡힌 나의 모습이었다. 늘 나에게 요구하던 상대를 향한 ‘따뜻함’ 이라는 단어는 나에겐 있었고 엄마와 아빠에겐 소멸된 단어였다.


사업이 힘들었을 때에도. 새로운 일을 시작했을 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너가?’ ‘너보다 잘난사람 많은데?’ ‘왜 편한길을 알려줘도 늘 그렇게 네 멋대로니?’ ‘우리가 널 잘못 키운 것 같아.’ 따위였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응원보다 늘 이렇게 나를 깎아 내렸다.부모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삶. 그런 이유로 나는 홀로 삶을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인정받기 위해 더 노력했을 것이 분명하다. 원하는 아들상이 되기 위해 자존심도, 삶도 내팽겨치고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들어 댔겠지. 그 결과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이니 그만 해야겠다 싶어졌다.


한 번은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너가 말을 잘 들어야 뭐라도 하나 더 주지.” 엄마가 나에게 뱉었던말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집안이 재벌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인 아빠가 알고 봤더니 학교의 이사장은 아닐까. 나 몰래 로또에 세번은 당첨되었었나 등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엔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 그 돈 없어도 잘 살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먼저 그리 말하니 그나마 있던 정마저 사라졌다. 그러니 아빠에게 힘듦을 주는 낙화의 계절은 나에겐 훌륭한 계기가 될테다. 위로 한 번 듣지 못했던 나의 통쾌한 복수극이랄까. 분명 아빠는 ‘너 그렇게 살다가 후회한다.’ 라는 말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내려 노력했더니 후회가 더 크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겨울(冬)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봄과 여름과 가을의 일들을 돌이키게 될 것이고.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어쩌면 이번 낙화의 계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은 확실하다. 그 표정이 웃음일 수도 분노일 수도 있으나 지금은 그저 각자의 입장에서 살아가야지 않을까 싶다. 아빠의 가을에 나의 여름을. 나의 여름이 아빠의 가을을 뒤섞고 싶지 않다. 각자의 계절은 각자가 견뎌야 할 몫이다. 내가 그래 왔듯.

작가의 이전글 사장의 마지막 당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