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회말부터라는 말이 있다. 2024년 한국시리즈에서 기아와 삼성, 전라도와 경상도, 광주와 대구가 오랜만에 불꽃 튀는 대결을 펼쳤다. 예전처럼 삼성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삼성라이온즈지만 괴력의 장타력을 앞세워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왔다. 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일찌감치 올라와 회복시간을 갖었던 기아 타이거즈의 2024년 화력은 모든 구단을 압도할 만큼 파괴적이었다. 연봉 1억 5천만 원으로 입단한 신인 김도영 선수는 150억 선수 같은 엄청난 타이거 발톱을 자랑했다. 기아 타이거즈가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팬인 전라도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나도 저절로 기아팬이 되었다.
사실 야구를 즐겨보지는 않는다. 스포츠 시합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응원하는 팀과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저 사람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저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받아가며 자기 일을 하는 건데, 왜 내가 그 사람들을 응원해야 하지? 왜 팬이 돼야 하지? 그 사람들이 나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즐거운 게 있는 것 같긴한데 잘 모르겠다. 비슷하게 가수나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들이 값비싼 선물을 사주고 편지를 쓰고 사랑의 표현을 하는지도 공감이 잘 안 된다. 그렇기에 나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결승을 안 보더라도 괜찮다. 드라마도 별로 관심이 없다. 남자치고는 특이한 케이스 같다. 그럼에도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을 할 때는 괜스레 기분이 좋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떤 대리 만족인 것 같다.
예전에 길거리에 포장마차가 많았던 시절, 여의도에서 제일 유명했던 포장마차 이름이 '구회말'이라고 들었다. '구회말'이란 말에는 뭔가 꽉 찬 느낌, 포기하지 않는 근성, 결과를 알 수 없는 긴장감, 각본 없는 드라마 같은 스포츠의 결말, 사회생활의 고단함들이 묘하게 버무려진 게 느껴진다. '구회말' 포장마차가 인기가 많자 다른 포장마차들도 구회말을 따라 했는데, 신통치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사이에 '구회말'을 견줄만한 포장마차가 등장했으니 이름하여 '연장전'이었다. '연장전'이란 단어 안에도 얼마나 주옥같은 의미들이 들어있는가?
게임의 모든 시간이 종료되었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아 주어지는 추가시간,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선 순간, 그런 초인적인 순간을 의미하는 '연장전'이란 단어에 애틋함이 배어 나와 직장인들의 마음을 끌어당겼을 것 같다.
야구가 제일 재밌는 순간은 투아웃, 투스트라이크, 쓰리볼, 만루상황이라고 한다. 모든 전광판에 불이 켜있는 순간, 그때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의 심정은 어떨까? 투수와 포수의 마음은 어떨까? 한국시리즈에서 만루홈런을 친 팀은 100% 우승하는 통계가 있다고 한다. 올해에도 만루홈런을 친 기아타이거즈가 우승을 했다. 투수가 전력을 다해 던진 공을 받아쳐서 담장을 넘어가는 만루홈런을 쳤을 때 기분이 어떨까? 수만 명의 관중이 환호하고 덕아웃이 난리가 나는 홈런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선수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대대손손 구전되고 영상으로 남아 팬들에 의해 길이 보전될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인생 최고의 순간일 것 같다.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는 말처럼, 아무리 뒤지고 있는 게임이라도 구회말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 미친 듯이 잘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미친 듯이 못하면 경기는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회말에는 미지의 세계 같은 묘한 느낌이 있다. 이처럼 경기는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타자들은 공을 치고 무조건 전력질주를 한다. 아웃이 될 게 뻔한 뜬 공이라도 수비가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우승한 이범호 감독도 타자가 전력을 다해서 1루로 뛰지 않으면 그 선수를 교체했다고 들었다. 무조건 어떤 상황에도 전력질주를 해야 프로선수다. 그래서 야구에서 제일 중요한 건 달리기다. 유소년 선수들을 관찰하는 스카우터들도 가장 유심히 보는 것이 주력 즉 달리기라고 한다. 주력으로 전반적인 운동능력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손흥민을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키운 손웅정도 가장 강조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했다. 손흥민 ZONE이라고 불리는 ZONE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좌우발로 500번씩 차게 했고,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아야 통과하는 볼트래핑을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하게 했다는 그의 기본기 훈련은 그 자체로 악명 높지만 그 훈련을 소화한 손흥민도 놀라울 뿐이다. 손웅정이 말한 기본에는 인성, 예의 같은 인격적인 요소들도 있어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부모에게 예의 없게 행동하는 선수는 그에게 축구를 배울 수 없다고 한다. 전인격적으로 기본기를 충실하게 훈련시키는 그의 훈련법이 세계적인 선수를 만드는 비법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각자의 영역을 달리는 선수들이라고 볼 수 있다. 회사원, 요리사, 선생님, 공무원, 화가처럼 보이는 역할은 달라도 몸담고 있는 분야의 플레이어다. 우리도 더 역량을 키워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기본이 탄탄해야 구회말 풀카운트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쌓아왔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다. 연장전에 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뒷심은 기본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나는 참 기본이 없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이 되면 쉽게 포기하고, 긴장되는 상황이 되면 실력발휘를 못한다. 발표나 리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기본이 없어서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기본을 잘 쌓을 수 있을까?
운동의 기본이 달리기인 이유는, 달리기가 심폐지구력, 근력, 협응력 같은 필수 운동능력을 조화롭게 강화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작가이자 디자이너다. 글을 쓰기 위해 좋은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 꾸준하게 글을 써야 한다. 최선을 다해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타자처럼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멋진 디자인을 공부하고 드로잉과 디자인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런 기본의 노력들을 꾸역꾸역 하고,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인생에 어떤 기회가 올지는 아무도 모르고, 구회말같은 상황에 만루홈런을 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기적 같은 일의 전제는 기본에 충실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알 것 같다. 스포츠를 봐야 하는 이유는 온 힘을 다해 뛰는 선수들을 보고 나도 저들처럼 뛰어야 한다는 인생의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끝으로 구회말 크게 뒤지고 있는 상황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인생은 구회말부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