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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온 족속

여호수아 9-10장

by 태리우스

integrity라는 단어가 있다. 정직함, 진실성, 온전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integrity는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integrity와 반대되는 단어로 ruse가 있다. 속임수라는 뜻이다. 크리스천으로서 integrity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ruse를 통해 구원을 얻은 민족이 있다. 바로 성경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기브온 족속이다.


크리스천이 거짓말을 통해 선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거짓말이지만 선을 이루는 장면들이 성경에 여러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고 도망쳤다는 거짓말을 하여 그들을 살려줬다. 그로 인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넌 후 첫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과 용기를 얻게 된다. 라합은 그녀의 가문이 구원받게 되는 은혜를 입고 훗날 예수님의 족보에 까지 오르는 구속사의 영광을 누리는 여인이 된다.


여리고 전투를 승리하고 아이성 전투의 실패와 회개, 승리를 지켜본 기브온 족속은 풍전등화처럼 진멸될 운명 앞에서 민족의 명운이 달린 계책이 필요했다. 그들은 먼 나라에 온 사신으로 꾸며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으려는 속임수를 준비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갔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전초기지인 길갈 지역으로 접근하여 발견되자 곧바로 붙잡혔을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이어 새롭게 이스라엘을 이끄는 여호수아 앞으로 끌려간 거짓 사신들은 꾸며낸 거짓말을 진심을 다해 연기하며 조약을 간청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여호수아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벌벌 떨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계책은 완벽하게 성공한다. 기브온 족속의 거짓말을 듣고 여호수아와 족장들은 그들과 화친하겠다는 조약을 맺고 맹세를 한다. 여호수아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한 발자국만 내딪이면 떨어지는 절벽 앞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처럼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의 맹약을 받은 거짓 사신들이 기브온 지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어땠을까?


기쁜 소식을 들고 기브온 성으로 가까워지자 파수꾼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성문이 연다. 서서히 드러나는 사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거지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보이자 기브온 왕과 기브온 백성들은 환호하며 탄성을 외쳤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그들만의 페스티벌이 펼쳤을 것 같다.


살면서 죽음과 가까운 순간을 경험하곤 한다. 사고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거나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경험처럼 인간은 스스로 알 수 없는 ‘생명의 끝’에서 다시 생명이 연장되고 ‘생명의 기회’가 다시 주어질 때 가장 큰 기쁨과 감사, 감격을 경험한다. 우린 그 기쁨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기브온 족속도 죽음 앞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을 때 기적의 기쁨과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기적, 그러고 보면 평범한 삶 자체가 우리에게 기적이고 축복이다. 익숙함으로 기적과 축복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현재의 삶을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으로 채우는 자신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며칠 뒤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 족속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족속이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기브온 성에 도착했을 때,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여있는 얼굴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스러운 마음, 속임수에 대한 분노가 밀려오는 동시에 무엇보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아이성의 뼈아픈 실패가 며칠 전이었는데, 또다시 가나안땅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어긴 샘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백성들을 진멸할지 말지에 대한 의견 충돌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을 것 같다.


온 백성들은 족장들을 원망한다. 조약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진멸할 수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일 수 도 없다. 그렇다고 가나안땅의 이방족속 기브온 백성들을 살려주고 함께 살아야 하는 리스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복잡한 상황에 다시 한번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빛을 발한다.


결론적으로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살려준다. 약속과 맹세를 했기 때문이다. 리더는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약속에 맹세까지 한 상황을 번복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는 상황이라도 말이다. 원칙대로 라면 여호수아와 족장들은 모든 책임을 지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죽음으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맹약을 지켜 기브온을 살려준다. 성경에서는 저주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제단의 종이 되어 이스라엘의 중심에 살도록 결정한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던 것 같다. 거짓말까지라도 해서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온 백성을 물리치지 않고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출애굽의 모든 기적들과 40년 광야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보살핌을 경험한 여호수아였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기생 라합의 가문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을 받아주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평생을 걸쳐서 경험하고 알았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살려주는 대신 그들에게 제단을 섬기는 종의 역할을 하도록 명령한다. 계약직이나 현재 살아있는 기브온 사람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말이다. 사형판결을 받고 사형집행 직전에 특별사면을 받아 다시 살게 된 사형수 같은 기브온 족속이 영원토록 여호와의 제단을 섬기며 떠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보다 힘들고 고된 노동, 산에서 돌을 뜨는 일처럼 더 궂은일을 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심판받아 진멸돼야 할 이방족속을 부정하게 여겨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격리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제단을 섬기는 종이 되도록 했다. 왜 그랬을까? 친구는 가깝게, 적은 더 가깝게 라는 말처럼 정치적으로 그들을 감시하려는 계획이었을까? 그보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이 하나님의 은혜의 공간을 떠나지 않고 은혜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는 영원한 장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온 자에게 영원토록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만드는 은혜의 포지션을 준 것이다. 여호수아의 결정을 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은혜가 느껴진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말씀대로 기브온 족속을 구원하사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1장 9절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원죄를 안고 태어나 기브온 족속처럼 심판받아 멸망받을 죄인이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로 극적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되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에게 여호와의 제단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와 예배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린 영원토록 교회와 예배를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린 멸망의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영광 안에 살 수 있다.


기브온이 꾀를 내고 속임수를 써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들이 허약하고 나약한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호수아서 10장 2절에서 기브온은 왕도 같은 성이며 아이성보다 크고 강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강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이스라엘의 종의 신분으로 바뀌었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명의 구원은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 불평불만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도광양회 정신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했었을까?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자 다섯 왕의 연합군이 기브온을 치기 위해 달려올 때, 기브온은 곧바로 이스라엘에 구원을 요청한다. 기브온은 강한 민족인 동시에 영리하고 지혜로운 족속이었다. 여호수아에게 곧바로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즉시 하나님과 예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기브온을 지키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기브온 족속은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시대를 지나 사울 왕의 시대에 사울왕이 기브온 사람들을 부당하게 죽이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다윗시대에 3년이나 기근이 생긴다. 이는 여호수아와 맺은 언약을 사울이 깨뜨린 결과였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살려주는 결정에 하나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과 맹세에 대해 보증하고 책임을 지신다는 암묵적인 동의였다. 곧 하나님께서 기브온 족속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왕 사울이 깨버린 것이다. 사울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3년 기근이란 고통을 겪게 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브온 족속과의 언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며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게 된다.


사무엘하 21:3-9절에서 다윗 왕 시대에 기브온 족속의 원한을 풀기 위해 사울 자손 7명을 죽이자 땅의 기근이 끝난다. 이를 통해 기브온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당당한 일원인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더 이상 종노릇하는 이방족속이 아닌 중요한 멤버십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 다윗왕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곳이 기브온 지역이다. 현대에도 대통령이 되어 처음으로 방문하는 장소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솔로몬이 기브온 지역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것은 기브온 지역의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혜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꼈던 솔로몬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지혜를 낸 기브온 사람들을 기억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지혜로 구원을 얻은 기브온 족속의 축복처럼 솔로몬은 기브온 지역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축복의 약속을 받는다.



기브온 족속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이 떠오른다.


그는 죄인이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고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회개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다. 기브온 족속이 멸망 앞에서 구원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죽기 전까지 회개의 기회가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기브온 족속은 회개해서 구원을 얻었지만, 그 외의 가나안 땅의 다른 족속들은 모두 진멸당했다. 마치 바로왕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아 이집트가 멸망한 것처럼 대부분의 가나안 족속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아 멸망당했다. 바로왕의 마음이 강퍅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 하신 것이었다. 또한 가나안땅의 왕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여호수아 11장 20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신다고 나온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게 된다.


기브온 족속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과 한 공동체가 되고 느헤미야 시대까지 가면 느헤미야 3장 7절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브온 사람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까지 한다고 나온다. 바벨론 포로기를 지난 후 더 이상 기브온 족속이란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더 이상 기브온 족속 출신이란 꼬리표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성벽 재건에 자격과 명분이 없는 이방인들을 철저히 배격했던 상황을 미뤄보면 한번 이스라엘에 편입된 기브온 족속을 끝까지 이스라엘 공동체로 붙들어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과 하나님의 언약을 실제적으로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실함도 함께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브온 족속도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붙들고 있었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신실함의 조화라고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교회와 신앙공동체, 믿음 안에 있어야 한다. 서로 하는 일과 모양이 다르더라도, 어떤 사람은 고상한 일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궂은일을 할지라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



신약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얻었다. 우린 우리에게 부여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명예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영적인 직분과 대조적으로 우리의 삶은 기브온 족속처럼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고단하고 힘든 종 같은 일들을 할지도 모른다. 그 차이를 채워주는 것이 믿음과 은혜라고 생각한다. 마르다는 일을 했고, 마리아는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다고 하셨지만 마르다의 일도 귀하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의 자세로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언제 중요한 기회가 올지 모른다. 종노릇 하던 기브온 족속이 성벽재건의 영광스러운 명단에 오르는 일처럼 말이다.


특별히 힘든 시기에 공동체를 버리면 안 된다. 겨울이 돼야 소나무가 푸른 것이 드러난다는 말처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이 힘든 시기를 틈타 반역을 하거나 배신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잠깐의 성공을 거둘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항한 대가를 치르고 진멸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브온 족속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언약을 지켰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일까?


기브온 족속의 배신을 듣고 가나안 땅의 다섯 왕이 기브온을 처단하려고 할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전쟁을 한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처럼 말이다. 그 전쟁 중에 성경에서 가장 큰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해와 달이 멈추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한마디로 지구의 자전이 멈춘 것이다. 과학적으로 지구의 자전이 멈추는 순간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죽게 된다. 시속 1670km의 속도로 돌고 있는 지구가 멈춘다면 함께 1670km/h로 돌고 있던 우리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 같은 속도로 다른 물체들과 충돌하게 된다. 그 충격에 살아남을 생명체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 충격이나 충돌 없이 자전이 멈춘다. 하나님께서 지구와 지구 위의 모든 물체, 생명체를 동시에 붙잡고 멈추게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조차 그런 일은 전무후무하다고 말한다. 태양과 달이 멈춘 기적 전에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져 적들을 몰살하는 놀라운 일들도 함께 일어났다. 기브온 족속은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했을 것이다. 화친조약을 맺고 곧바로 자신을 구하러 온 이스라엘 자손들과 그들을 도우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그 놀라운 기적의 기억과 감격은 기브온 족속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기브온 족속 전체가 하나님께 회심하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날이 터닝포인트가 되어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을 떠날 수 없었던 더 큰 힘은 바로 예배와 제사 중심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고단하고 힘든 일이지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맡으므로 평생, 영원토록 제단을 떠날 수 없게 된 것이 오히려 은혜와 축복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제단을 섬기는 레위지파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옆에서 함께 받아 누렸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배를 섬기는 기브온 족속을 크신 사랑과 은혜로 보살피셨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은혜를 경험한 기브온 족속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결코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고 예배 중심의 삶을 살며 예배를 절대로 떠나서는 안된다. 예배가 생명이고 예배가 성공이며 행복이고 기쁨이다. 예배에 실패하면 인생에 실패한다는 말처럼 어쩌면 예배가 우리에게 모든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린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예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이 제단을 떠나지 못하고 영원토록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영원토록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길 원하신다. 기브온 족속이 비록 Integrity 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바라며 나아갈 때 영원토록 품어주신 것처럼, 죄인으로 태어나 ruse 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바랄 때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영원토록 품어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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