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S MY LIFE
여자가 남자를 보는 기준이 4단계라고 한다.
1. 키도 커
2. 키는 커
3. 키는 작아
4. 키도 작아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3등이다. 키도 작고 잘생긴 얼굴도 아닌 내가 어렸을 때 제법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옷을 잘 입어서였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패션에 눈을 떴다. 고등학생때는 체육시간에 모두 똑같은 체육복을 입었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학교 근처 편집샵 옷가게 쇼윈도에 걸려있는 티셔츠를 눈여겨봤다가 그 옷을 사서 체육복으로 입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인 1990년 초중반에는 소비문화가 팽창하고 삶의 수준이 올라가던 시기였다. 외국의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는데 대표적인 브랜드로 게스, 리바이스, 겟유스트, 마르데 프랑스와 저버, 인터크루, 닉스, 스톰 같은 옷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패션을 중요하게 여기던 나는 그 옷들을 무척 입고 싶었다. 동네 친구 중에 부잣집 녀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는 그 옷들을 대부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산 옷들의 TAG들을 모아서 자기 방문에 트로피처럼 붙여 놓았는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그런 옷이 없기에 그 브랜드 로고들을 종이나 팔에 그리고 다녔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브랜드 옷은 없으니 로고라도 그려서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 압도적으로 유행한 브랜드가 GUESS 게스 청바지였는데, 누군가의 엉덩이에 GUESS가 적힌 역삼각형 로고가 박힌 포켓이 보이면 모든 신경이 그 로고로 쏠렸다. 우리가 입던 옷들은 마치 군인들의 계급장처럼 보였는데 시장표는 병사들이고 아티스, 프로스펙스 같은 국산 브랜드는 부사관, 리바이스는 장교, 게스는 장군들의 별처럼 보였다. 일개 병사였던 나는 장교들과 장군들이 달고 있는 계급장을 진심으로 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놀고 저녁에 집에 들어갔는데, 방 안쪽에 뭔지 모를 쇼핑백이 보였다. 왠지 우리 집과 어울리지 않은 고급스러운 무게감이 느껴지는 쇼핑백이었다. 서울에서 모자공장을 한 우리 집은 방 한 칸은 공장, 한 칸은 온 가족이 같이 잠을 자는 투 룸에 살고 있었다. 주방과 화장실은 밖에 있어서 신발을 신고 나가야 했다. 대학원룸같이 작은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모자가 만들어지고 나는 종종 실밥을 떼는 시다일을 하곤 했다. 영세한 가내수공업 공장이었다.
그런 집에 웬 쇼핑백일까? 상상도 못 했는데 그 쇼핑백안에는 청초롬한 옥처럼 푸르른 게스 청바지가 들어있었다. 한눈에 봐도 청바지 원단에서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마치 부잣집 도련님이 가난한 평민 집에 놀러 와서 도도하게 방 안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종이 쇼핑백에는 GUESS 로고가 프린트되어있었다.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 온 진품 게스 청바지였다. 오른쪽 엉덩이 포켓에는 정역삼각형의 게스 로고가 단단하고 세련되게 박음질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 입어보는 브랜드 옷이었다. 게스 청바지를 사달라고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친구들 얘기를 하면서 다른 애들은 브랜드 옷을 입는다고 말을 했었던 걸까? 아니면 팔뚝에 브랜드 로고를 잔뜩 그리고 다니는 아들이 안쓰러웠던 걸까? 하긴 그러지 않았다면 엄마가 왜 게스 청바지를 사 왔겠는가? 엄마는 큰 마음을 먹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백화점 옷을 사 왔다. 당시 기억으로 7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20-30만 원대 청바지로 준명품 수준이었다.
나는 그 옷을 1년 내내 입었던 것 같다. 옷을 빨고 다음날 입기 위해 전자레인지에 돌려 입었다. 젖은 옷을 탈수기로 돌리고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옷이 금방 말릴 수 있다. 전자레인지에 몇 분 돌리면 젖은 옷의 수증기가 뜨겁게 달궈지는데 그 옷을 꺼내서 탁탁 털면 수분이 금세 날아가고, 그런 걸 몇 번하면 입을 만한 상태가 된다. 청바지라 젖어도 푸른색이니 별 티도 안 난다. 그렇게 나는 그 청바지를 수도 없이 입었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브랜드 옷 게스 청바지였다.
엄마가 게스 청바지를 사 온 이후로 우리 집이 점점 잘 살기 시작했다. 두 칸짜리 공장 겸 방에서 전세로 이사를 했다. 3층 집에 2층이었는데, 문을 열면 거실이 나오고 방이 3개였다. 안방, 내방, 여동생방이었다. 봉천동 달동네에 신혼을 시작했던 엄마와 아빠는 그 집이 얼마나 좋았는지 이사하고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에 집을 구경을 하러 왔다 갔다 하곤 했다.
공장도 커졌다. 이름 모를 모자들을 만들었던 아버지 공장에서 유명 브랜드 모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엄청나게 유행하는 브랜드의 모자를 만들고부터, 우리 집은 전세를 탈출해서 단독주택 집도 사고 승용차도 사고 주말에는 여행도 하고 비싼 레스토랑도 다니는 부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우리에게 백화점에서 옷을 맘껏 사줬다. 나이키, 아디다스, 폴로, 리바이스부터 때론 알마니 같은 명품 옷도 입어봤다.
고등학교 때부터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고 패션에 더욱 열을 올리며 유행하는 옷들을 사 입었다. 나는 나를 그렇게 포장했다. 고등학교 1학년때 동아리 미팅을 하는데, 그날 파란색 아디다스 쫄티에 힙합바지를 입고 나갔다. 7:7 정도 되는 미팅이었는데, 남자애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면 여자애들이 마음에 드는 남자애 뒤로 간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고 상대가 마음에 들면 그날 데이트 짝꿍이 되었다. 놀랍게도 그날 대부분 여자애들이 내 뒤에 줄을 섰다. 된장찌개처럼 우중충한 무채색으로 가득한 미팅장에서 상큼한 레모네이드처럼 유행하는 스타일로 컬러풀하게 치장을 한 내가 눈에 확 띄었던 거 같다. 패션의 힘을 온몸으로 체험한 날이었다.
그다음 주에는 너무 무리수를 둔 패션으로 나가서인지 성과가 좋지 않았다. 파란색 아디다스 쫄티 안에 갈색 남방을 입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을 것 같다. 한참 운동하고 공부해야 할 때 옷 사는데 정신이 팔려서 야자시간을 땡땡이치고 유행하던 힙합스타일의 옷을 사기 위해 이태원에 가기도 했다. 그렇게 10대, 20대 황금 같은 시기에 셀 수 없는 시간을 옷과 신발을 보기 위해 매장을 찾아다니며 인터넷 쇼핑을 했다.
그러던 내가 30대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30대 중반부터 인생의 여러 문제들이 생기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마치 찬란하게 빛나던 푸른 풀밭에서 발을 헛딧여 어두운 골짜기로 떨어져 버린 것 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자 더욱 옷 같은데 신경 쓸 여력도 없어졌다. 최근에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기부스토어에서 옷을 사입기도 한다. 기부 스토어에 괜찮은 새 제품들도 많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남방 5천 원, 바지 7천 원 옷을 입고 있다. 원단이 고급스럽지는 않고 스타일이 약간 이상해서 왜 기부스토어에까지 밀려내려 왔는지 알겠지만 가격 대비 아주 만족스럽다.
중학교 때 패션에 눈을 뜰 게 아니라 공부에 눈이 떴거나 운동에 눈이 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다. 엄마와 아빠는 큰 마음먹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튼튼해지라고 사준 게스 청바지는 나를 공부와 멀어지게 했고, 운동보다 옷에 관심을 갖게 해 줬다. 타임머신이 있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옷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 것 같다.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성경에서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며 몸이 옷보다 중요하다고 하셨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 중요한 나의 인생을 낭비했다. 어떻게 하겠는가? 후회해 봐야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남은 인생은 나에게 더 중요한 일에 힘을 쏟아야겠다. GUESS 청바지의 로고처럼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GUESS 해야겠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의미 없는 삶을 돌이켜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