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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이반짝 May 04. 2024

시험이 뭐길래


망했어!


중간고사 기간 첫날이었다. 시험이 끝난 중2딸에게 전화가 왔다. 첫마디였다. 입만 열면 망했단다. 망했어가 인사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아쉬움 가득한 얼굴과 동시에 환하게 웃고 있다. 이렇게 해맑을 수가. 다행이다. 진짜 다행인지는 알 수 없다. 속상해서 우는 것보다는 낫다. 잘해서 웃는 게 아니다. 공부 안 해서 어이없어서 웃는 거일 수도. 꼭 최하의 경우를 먼저 얘기한다. 내일은 수학이랑 국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늘 친 시험결과가 아니다. 이미 지나간 건 제쳐두고 다가올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어미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친 시험지를 들고 매기기 시작한다. 점수의 결정은 주관식에서 판가름 나는데 지금 매긴다고 알 길이 없다.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보고 외우겠다"라고 해도 들리지 않는가 보다. 같이 있으려니 입이 근질거린다. 구구절절 맞는 말만 나열해 봤자 딸의 귀에 들어가는 건 없다. 치지도 않은 수학은 벌써 망했다는 망언을 남긴다. 해보기도 전에 저런 허탈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멀쩡했던 내 속도 뒤집어질 것 같았다. 지금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서로의 정신건강을 위한 선택이다. 책도 반납할 겸 나갈 준비를 하는데 배가 고프다고 한다. 용가리를 구워주고 방울토마토와 옥수수 반 개를 대령했다.

푸른 잎을 보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는다. 산속의 다진 흙을 천천히 밟아나간다. 걷고 또 걷는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울창한 숲에 기댄다. 


딸의 말은 답답하니 하는 소리인 거 안다.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하고 싶을 것이다. 딴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내 눈에 성이 차지 않을 뿐이다.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고 공부방식이 다르고 애를 쓰는 정도가 다르다. 여유 있게 말해서 이제 중2다. 조급하게 생각하면 벌써 중2다. 부를 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으나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들들 볶진 않을 것이다. 잘해도 내 인생 못 해도 내 인생이다. 딸아이는 앞으로도 많은 벽에 부딪힐 것이다. 스스로를 책임지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시험 좀 망해도 웃을 수 있는 정신력만큼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다음날 큰아이는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이랑 시내를 다녀온 뒤였다. 퇴근하고 집에 오는데 남편은 거실에 큰딸은 본인 방에 있었다. 거실테이블에는 잘하든 못하든 고생한 딸을 위해 족발과 치킨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서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남편의 표정은 밝았고 혼내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황스럽다. 속상한가 보다. 어쨌거나 시험은 끝이 났으니 맛난 거 먹고 이번에 부족했던 점은 다가오는 기말에 만회하자고 하였다. 다 큰(?) 언니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둘째도 의아해한다. 누구 하나 모난 상황은 아니었다. 막국수를 먹으며 웃고 있었는데 울고 있다. 또 웃는다. 시험이 뭐길래 아이의 체에 묘한 변화가 올 것만 같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이 감정 잊지 않았으면 한다. 왜 슬픈 감정이 들었는지 왜 웃음이 났는지를. 엄마인 나는 최소 5년은 이런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우리 집 근처 산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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