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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Nov 08. 2024

낙엽으로 기껍다

스승과의 영원한 이별 앞에 깊은 슬픔에 잠긴 한 선비가 제문을 올렸다.      


질문하면 늘 자상하게 이치를 설명해 주셨어라

혼탁한 세파에 지주가 되시리라 모두 기대했건만

어둠이 깊은 밤인 지금 길잡이를 잃고 말았다     


스승은 깨우쳐야 할 것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불순물이 뒤섞인 거센 파도를 넘기 위해 붙잡고 있어야 할 기둥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음 순간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인 지금 홀연 그 길잡이를 잃고 말았다. 


스승은 그렇게 후대를 뒤로 하고 먼저 떠나간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발자취는 인류 역사에 가득하다. 어느 고대인의 지혜가 담긴 문자, 찢어진 두루마리의 한 귀퉁이에 남은 철학과 낭만, 양피지의 글자에 담긴 세상과 우주... 

  

상상하기도 어려운 가마득한 시절에 살다 간 이로부터 어제 떠나간 스승에 이르기까지 지주이며 길잡이인 이들의 흔적은 어둠 깊은 밤에 한줄기 빛이 되어 준다.     


지금보다 잠이 많았지만 그 잠을 이기는 집중력이 있던 시절, 얼마나 많은 날을 역사의 스승들이 남긴 글을 붙잡고 지새웠던가. 


석학의 깊이 있는 사유에 지적 호기심이 자극되어 시간을 잊고, 시인의 감성에 풍덩 잠겨 들고, 소설 속 인물들과 발걸음을 같이했다. 시대를 갈파한 혜안에 머릿속에 전구가 들어오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고, 한 마디 명언에 인생의 무게가 달리 느껴지기도 했다.      


  얇은 잠바 입은 것을 후회하며 총총걸음으로 도서관에서 서너 권의 책을 빌려왔다. 책상 위에 올려두니 곶간이 가득 찬 것처럼 든든하다. 


그중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집어 들어 “역시!”하고 무릎을 치며 빠져 들어가던 중 내 안에서 무거운 질문이 일어났다.      


"당최 너는 뭐 하려고 이 혼탁한 세파에 네 글까지 보탰느냐!"


  창 밖에 보이는 찻길 따라 늘어선 가로수가 바래가는 초록과 물오르는 불그스레함이 뒤섞여 흔들리고 있다. 선선한 바람 따라 흔들리며 매연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다. 


나 역시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어찌하리. 나의 살아 있음은 글쓰기인걸...

기어코 내 손을 통해 나온 그 활자들이 낙엽의 하나로 쌓여있다 스러져도, 내년 봄에 올라올 싹에게 먼지만큼의 자양분이라도 된다면 나는 기꺼이 낙엽으로 스러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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