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 자의 무게를 지키기 위해
이어령 선생의 글 가운데 글 쓰는 이에게는 백지가 공포로 다가온다는 구절을 읽었다. 한 줄 한 줄 글을 써나가는 창작의 고통이 크게 공감되는 문구였다.
명함이 있고, 이름 뒤에 소속이 있던 시절에는 일 년에 논문을 두 편 이상 발표했다. 논문은 대개 관련 학자들이 참가한 학술대회나 학회에서 발표했고, 날 선 비판과 토론을 감수해야 했다. A급 학술지에 게재하려면 3명의 심사위원에게 심사를 받고, 편집회의에서 통과되어야 했다. 학술논문 이외에 단독 연구서와 공저도 집필해 출간했고, 이런저런 글도 수시로 지면에 활자화했다.
나는 세간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이거나 내로라하는 학자도 아니었다. 학문의 길을 선택해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 내야 하는 일상이었다. 변변치 않는 재주로 공을 굴리려니 불면과 소화불량은 기본이고, 글 한편 쓸 때마다 십 년은 늙는 것 같았다. 이어령 선생이 그럴진데, 나같은 사람이 오죽하였을까.
하지만 능력껏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활자화될 때는 다시는 바로잡을 기회가 없이 세상에 나간다는 긴장감에 손톱만 물어뜯었다. 그렇게 나를 갈아먹으면서 지면에 글씨를 내느라 진을 빼느냐고 묻는다면, 거기에 함께 실릴 내 이름 석자 때문이었다. 내 이름으로 활자화되니, 오로지 내가 해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와는 급이 다른 유명인들이 표절에 휘말리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어쩌다 한두 명의 경우도 아니어서, 새삼 놀랍지도 않다. 논문 집필자로 영구히 박제되는 이름의 무게를 그리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것인가.
표절은 아마 글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을 것이다.
과거시험장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은 매우 엄격하다. 그러나 은 그 금지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성과 이익을 좋아하는 파렴치한 무리들이 도도하게 이를 범하여 선비의 풍속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조선시대 ‘출세의 사닥다리’인 과거시험에 글 표절을 엄히 금지함은 당연한 일이다. 이를 범한 무리에게는 엄한 징계가 따랐다.
명종 때에 외척으로 권문세가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여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다. 마침내 공론(公論)이 일어나 관직을 삭탈당했다.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 되었다. 이에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다. 참으로 국가의 수치이로다.
위에 보인 '국문'은 요즘으로 치면 취조 내지 조사이겠지만, 그 당시로 말하면 고문+취조이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처럼 표절이 드러나면 선비의 풍토를 오염시킬 뿐 아니라, 국가에도 수치스러운 일이므로 엄히 다스렸다. 공적인 벌만이 아니라 영원히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남는 불명예를 안는다. 저기 기록된 이정빈, 여계선처럼 말이다.
예전에는 글을 쓰면 동료나 선후배에게 읽어줄 것을 부탁했었다. 이번부터는 소설을 집필하면서 AI에게 자문을 구했다. 혹시라도 무지의 소치로 실수를 범할까 두렵고 조심스러웠다. 소설 초고를 마친 뒤 문단마다 AI에게 이 문장가운데 이미 세간에 나와있는 문장이나 표현이 있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석자, 곧 나의 인격이며 정체성인 그 이름 석자의 무게가 세상 어느 무게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표절 뉴스가 먹구름 튕겨 나오듯 불거져 나오면
글 쓰는 사람으로 수치감이 밀려든다.
그러지들 말자고요.............
인용문 출처 : 심수경, 견한잡록(遣閑雜錄), 한국고전종합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