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말이 있듯, 제가 어린 시절에 감기는 주로 추운 겨울에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얼마나 발이 시렸는지 모릅니다. 시린 발을 동동 구르다 동상이 걸려 벌겋게 부어오른 적도 있습니다. 집에서도 책상 앞에 앉으려면 손이 너무 시려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았는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곤 했습니다.
결국 겨울의 통과의례처럼 감기에 걸리면, 할머니 손에 ‘판피린’을 얻어먹고는 펄펄 끓는 열을 견디며 엄마가 퇴근해 오시기만 기다렸습니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지극정성으로 저를 돌보셨지만, 아플 때만큼은 이상하게도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어둠이 깔릴 즈음, 엄마가 오셨습니다. 대문을 열어주신 할머니에게 제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엄마는 신발도 채 벗지 못한 채 달려와 제 이마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아직 바깥바람 냄새가 배어 있는 그 손은 늘 차가웠습니다. 그런데 그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는 순간, 신기하게도 고열의 뜨거움이 조금씩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안도감이 밀려오는 순간, 할머니 앞에서 꾹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막내라고 온갖 어리광을 다 받아 주셨던 할머니는 어느새 떠나신 지 삼십 년이 되었습니다. 신발도 제대로 못 벗고 달려와 제 이마를 짚으며 “아이고, 이렇게 아픈지도 모르고 엄마가 이제야 왔구나” 하시던 엄마는 이제 구순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얼마 전, 밤에 에어컨을 켜둔 채 ‘조금 있다 끄자’ 하다가 그만 깜빡 잠들고 말았습니다. 결국 여름 감기에 걸렸습니다. 이마에 엄마의 손길이 닿을 수는 없지만, 전화로 한껏 어리광을 부려봤습니다. 이상하게도, 목소리만으로도 열이 가라앉고 감기가 낫는 듯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혼자 말해 봅니다.
"엄마, 아직 제 곁에 계셔 주심이 그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