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천지간에 조용한 곳이 없다.
‘적막강산’이라는 말은 이제 사어(死語)가 되어 사전 속에서나 겨우 숨을 쉰다. 정호승 시인은 산문 「고요함을 찾아서」에서 그 잃어버린 고요을 말한다. 시인은 서울에서 느낄 수 없는 고요를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제주로, 더 멀리 마라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피서객들의 고성방가와 온갖 소음뿐이었다. 지쳐 돌아오는 길에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에게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고요와 관조가 없다면, 우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영혼은 잃고, 육체만 남게 되지 않을까. 고요를 통해서만 삶은 성숙할 수 있다."
그 문장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영혼과 내면, 정신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없다면, 나이는 먹어가도 여전히 철들지 못한 아이로 살아가게 된다. ‘나잇값’이란 시간을 고요히 견딘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닐까. 나잇값을 치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구순을 넘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혼자 사는 친구들은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TV를 켠데. 조용함이 싫데."
아, 누군가에게는 TV소리가 순기능을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전혀 달랐다. 결혼 초, 시댁에 살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 TV 소리였다. 시부모님은 새벽부터 밤까지, 잠깐 눈 붙이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거실 TV를 큰 소리로 켜 두셨다.
나는 그때 석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귀마개를 하고 헤드폰을 눌러써도, 소음은 벽을 뚫고 들어왔다. 그 시절 내 공부는 소음과의 전쟁이었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선비들이 서원을 찾는 까닭은 세상의 떠들썩함을 싫어하여 전적을 싸 들고, 적막한 물가에 숨어 고요히 덕을 쌓고 인을 성숙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왜 적막한 곳을 사랑했을까. 왜 적막한 곳을 찾아들어가는 이를 참 선비로 칭송했을까. 고요 속에서 사유가 깊이 자라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문명의 이기인 ‘사중 방음 유리문’ 안에서만 고요를 얻는다. 인위적인 적막이지만, 그 안에서 비로소 나만의 고요한 호흡을 갖는다. 세상의 소리는 분노, 좌절, 허탈, 비교, 욕심을 소용돌이 휘몰아치듯이 일어나게 만든다. 그것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시인의 말처럼, 세상 소리를 차단하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길러본다.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나잇값을 치르기 위해.
인용문 1.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열림원, 2015, 79쪽.
인용문 2. 이황, 근재집 제4권 / 부록(附錄) 방백 심통원께 올리는 편지. 한국고전종합DB
여기에서는 서술의 편의상 적절히 의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