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편견이야."
어느 날, 길을 걷다 까마귀에게 뒤통수를 연달아 세 번이나 얻어맞았다. 발톱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따끔했다. 하지만 까마귀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공격이었다.
마침 지나친 가로수 아래 어린 까마귀가 눈에 들어왔었다. 흘긋, 잠시 눈길을 던진 게 화근이었다. 그 짧은 눈길 하나를 어미는 놓치지 않았다. “까아아아아르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든 일격. 까마귀 눈에 나는 위험한 불청객이었다. 그 뒤부터 도심 속 까마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새끼를 보호하려던 그 어미 까마귀가 떠오른다. 마음이 아리다.
예부터 까마귀는 새끼에서 자라나면,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 하여 ‘효조'(孝鳥)라 불렀다. 사랑, 인정, 자비의 새(慈烏)라고도 일컬어졌다. 까마귀 소리는 ‘즐거운 노랫소리’ 표현되었다. 즉, 까마귀는 광명과 생명의 새, 효의 상징, 왕권과 권위를 뒷받침하는 길조였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에도 까마귀는 헌신적으로 다리 역할을 하는 새였다.
그러나 서양에서 까마귀는 달랐다. 불행과 재앙의 전조, 죽음을 부르는 검은 목소리였다. 특히 에드거 앨런 포의 「갈까마귀」 이후, 까마귀는 문학과 예술 속에서 우울과 어둠의 아이콘으로 굳어졌다. 물론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의 까마귀처럼 지혜와 예언의 새로도 등장했지만, 여전히 어둠의 그림자가 더 짙다.
고양이도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는 고양이에게 불길하고 음산한 그림자를 씌운 대표적 작품이다. 동양의 문헌에 나오는 고양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호랑이와 함께 제사에 모셔지는 유익한 동물이었다. 지금은 까마귀가 영리한 새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고양이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서양 문화가 덧씌운 부정적인 이미지를 미흡하나마 덜어내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편견에 시달린 게 까마귀와 고양이뿐이랴.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은 아주 단편적 경험에 따른 편견인 경우가 제법 많다. 사실 사람들은 대개 저마다의 ‘편견’으로 똘똘 뭉쳐있는지 모른다. 외모, 말투, 직업 같은 사소한 정보 한 조각만으로도 상대 전체를 단정하고, 그 한 조각을 곧 그 사람의 전부로 간주한다. 나에게도 누군가의 뒤통수를 가격할 만한 편견의 발톱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애써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까마귀나 고양이가 우리가 가진 편견을 알게 된다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태초부터 지금까지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본능대로 살아내는 생명일 뿐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버티며 애쓰는 생명이다. 그러니 사는 동안 날카로운 편견의 발톱 대신 따스한 마음의 손길을 남기고 싶다. 발톱을 세우며 진을 빼기에는 너도 나도, 우리 모두 길지도 않은, 먼지 같은 삶일 뿐이다.
<손길 하나 >
날카로운 발톱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영롱한 눈빛에서
억울함을 읽었다.
까마귀도, 고양이도
다만 살아내는 생명일 뿐.
먼지 같은 삶 위에
따스한 손길 하나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