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입사와 퇴사
10여 년 전,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대학 4학년 시절
그때부터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요?
4학년이어야만 지원할 수 있는 대기업 인턴십 공고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고
보통 인턴십에 합격한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바로 정규직이 되거나, 대부분 그다음 시즌의 공채에서 가산점을 받아 무리 없이 합격이 되곤 했습니다. (대부분이라는 얘기는 100%는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인턴십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광탈의 연속), 그 대신 학점 관리라도 졸업 때까지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점 관리만 하다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꽤 높은 학점으로 졸업식 때 장학금을 받기도 했었죠.
하지만 아시겠지만 학교 장학금은 취업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가산점도 없죠.
졸업을 한 이후로도 번번이 공채에선 서류 탈락이었고, 면접까지 간 경우는 정말 드물었지만 그마저도 죽 쑤고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1년(재학 중일 때부터 인턴십 전형부터 포함하면 거의 1년 반)의 취준 생활 동안 자신감과 자존감은 바닥이 되었고 더 이상 용돈으로만 버틸 수 없겠다는 생각에, 대기업 공채는 포기하자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현실과의 타협, 아니 어쩌면 첫 번째 현실로부터의 도망
여느 날처럼 취업 사이트를 뒤지다가 문화 마케팅이라는 직무에 3달에 한 번씩 회사에서 개최하는 콘서트에 참여할 수 있는 꽤 흥미로운 구인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회사는 국내에서 탑으로 손꼽히는 언론사였고, 지원 안 할 이유가 없었죠.
(큰 언론사인데 공채로 뽑지 않는 것부터 의아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서류통과 후, 면접을 보러 갔고 면접은 아예 기억이 나질 않는 거 보니 그냥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던 것 같아요.
보통 큰 회사들은 실무진 면접과 임원진 면접과 같이 2차로 나누어서 면접을 보는데, 한번 면접에 바로 합격.
첫 출근 날, 단정하게 입고 오라고 해서 면접 때 입었던 검은 정장을 입고 출근을 했습니다.
원형 테이블이 있던 작은 회의실에 나를 포함해 3명의 입사자가 있었고,
나이가 조금 지긋하신 분이 들어와 간단한 설명 후에 사무실로 배정이 되었습니다.
아,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분이 들고 오신 종이가 갱지였고, 폰트는 궁서체였다는 것을...
사무실 자리를 안내받고 나니 뭔가 촉이 쎄하더라구요.
학교 도서관에서 보던 투박한 나무 책상 위에 유선 전화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습니다.
그래, 필요한 건 내가 가지고 와서 채우면 되지... 근데 컴퓨터는 없는 건가?
컴퓨터 모니터는 팀장님 자리에만 있었고, 모든 직원들의 책상에는 전화기와 문구류, 노트 등이 전부였었죠.
(6-70년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2010년대에 있었던 일이라구요ㅎㅎ)
교육을 한다고 해서 다시 아까 그 작은 회의실로 쫄래쫄래 들어갔더니,
서류철 묶음을 하나씩 나눠 주셨는데, 내용이 이상합니다. 상황별 시나리오??
문화 마케팅이라고 부르고, 실제는 전화로 회원권을 판매하는 업무였던 거였습니다.
해당 업무인 줄 모르고 지원했던 저로써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원권 얼마에 가입하시면 1년간 콘서트 몇 회, 연극 몇 회 등을
관람하실 수 있는 혜택이 제공이 되......(띠띠띠..)
여보세요? 여보세요?
회원권에 가입하시면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그게....(전화하지마세요.(개정색) 뚝.)
하루에 제가 전화를 돌린 횟수,
제가 평균 통화한 시간, 한 통화를 지속한 시간 등이 팀장님 모니터에 기록이 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고 말고 와는 상관없이 저에게 붙여지는 성과표 같은거였죠.
함께 입사했던 두 명의 동기들은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그만두겠다는 말을 못 해 속으로 끙끙 앓으며 일주일을 더 다녔고,
전화기 너머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거절과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주일이 되던 날, 퇴근 후에 대학 선후배들과 술을 마시다가 뻗어버렸는데,
핸드폰은 배터리가 나가 알람을 듣지 못했고 그렇게 저는 무단결근과 함께 첫 번째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의도한 대로 되어버렸죠.
비겁하지만, 결국 저는 또 도망쳐버린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현명했던 도망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