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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얼티밋 Mar 02. 2022

37. 영국에서 조깅에 취미를 붙이다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그냥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조깅은 좋아한다.


 원래는 조깅도 싫어했다. 30초 정도 달리면 숨이 차서 더 달리지 못했기에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걸 정복해보겠어, 같은 승부욕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깅을 시작하게 된 건 같이 지내던 사람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조깅을 시도하게 해준 건 프랑스에서 만난 크리스티나였다. 크리스티나는 운동용 레깅스와 탑, 뛰면서 휴대폰을 안정적으로 넣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러닝용 암밴드까지 가지고 있었다. 몇 번 그녀의 조깅에 따라간 적이 있는데 객관적으로 암울한 수준인 내 달리기를 항상 응원해주며 기다려주곤 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산책로에는 항상 나뭇잎이 떨어져 웅덩이 속에서 썩어가고 있었고 온 길이 눅눅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굳이 할 이유가 없어서 몇 번 뛰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조깅을 시도하게 해준 건 영국의 미셸이었다. 미셸은 전문 퍼스널 트레이너다. 집 옆에 창고를 개조해서 체육관으로 만들어 일을 쉬는 날에도 운동을 한다. 개 산책은 뛰면서 한다. 산책을 하지 않을 때도 그냥 뛰러 나가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과 컨디션을 예민하게 관찰했고 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 나도 운동을 시도하게끔 격려해주기도 했다. 그녀가 일하는 체육관에 데려가 관장님에게 무료로 PT를 받을 수 있게 해주기도 했고 집 창고 체육관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도 해주었다. 가끔은 그녀가 직접 내 운동 루틴을 짜주기도 했다.


 그러다 날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3월을 지나 4월이 되었다. 문제는 나한테 봄 옷이 없다는 것 정도랄까. 가족들에게 부탁해 한국에서 택배를 한 번 받긴 했지만 비싼 항공 배송료 때문에 줄이고 줄인 옷은 항상 모자랐다. 그 때 루스가 자기 옷을 조금 빌려주었다. 대부분 운동용 반팔과 탑이었다. 흠, 가진 옷의 절반은 운동복이고 날씨도 좋고, 운동하다 물어볼 사람도 있겠다. 조깅 한 번 다시 해보자.


 그리고 내가 지내던 곳의 산책로는 끝내주게 멋졌다. 마을 입구와 연결되는 산책로에는 양옆에 나무 그늘이 있었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 전혀 축축하지 않았다. 나무 지대를 넘어가면 완만한 구릉 목장 사이로 난 길로 연결된다. 길 양옆에는 푸른 초지가 끝없이 보이고 초지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와 양들이 있다. 가끔 푸른 색, 붉은 색 마크가 있는 양들도 보인다. 저들끼리 모여 앉아 천천히 곁을 달려 지나가는 낯선 이를 경계하는 눈길로 쳐다보는 소들은 종종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 멀리 한 구릉 건너에는 언덕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 그 위에는 야생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다트무어 포니Dartmoore Pony라 부르는 조랑말들이다. 임신한 말도 있고 어린 말을 데리고 풀밭에 신나게 등을 비비며 누워있는 어미 말도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할 수 있지만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것 정도는 말들도 신경쓰지 않는다.



 소와 양, 말과 함께 탁 트인 초지 위에 있는 산책로라니. 


영국의 4월은 날씨도 끝내줬다. 햇살이 비쳤지만 날은 선선했다. 이때 산책로를 탁, 탁 내딛으며 달리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다. 땀이 나지만 달리는 바람에 곧바로 말랐고 팔 위아래로 스치는 시원한 공기가 기분좋다. 계속 달리다 보면 숨이 차고 다리 근육이 아프다. 그때 속으로 '조금만 더'를 외치며 예상 한계치보다 10초를 더 달릴 때는 쾌감이 밀려온다. 저기 저 나무까지만, 아니 그 다음 나무까지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시작은 30초였지만 두 달을 꾸준히 달리다 보니 30분을 천천히 달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양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안녕, 또 왔어.' 라고 인사하며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렇게 조깅 능력을 키우다 보니 점점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리기는 내가 정한 목표치와 목표치 달성이 10초 안에 끝날 수 있는 초단기 계획이나 마찬가지다. 저기 저 나무까지만 달려야지, 하고 마음 먹고 거기까지 달리면 계획 달성이다. 계획을 세우고 달성하는 일을 달리는 내내 반복하는 것이다. 힘든 감각 또한 아주 구체적이고, 극복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발을 뻗으면 된다는 것. 장애물을 만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힘들지만 스트레스가 풀린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같다면 나가서 달려보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성취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저 나무까지 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하면 안 된다. 한 달 후에는 그 나무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은 생각보다 정직해서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성장하게 된다.


 요즘도 일이 끝나고 몸에 힘이 남아있다면 내 정신을 위해 나가서 달린다. 달리고 달리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고 몸도 건강해진다. 나는 달릴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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