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골목 사진관에서
부산역에서 보수동 책방골목까지는 택시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택시를 타자 기사님은 책방골목에 뭐 볼 거 있다고, 거기는 왜 가는 거냐고 물어보셨다. 혹시라도 우리가 부산의 멋진 관광지를 놓치는 우를 범하면서 책방골목에 가는 것일까 봐 걱정하시는 듯 보여서, 해운대와 광안리에도 갈 계획이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랬더니 해운대와 광안리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가 돌아왔다.
기사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해운대 : 바닷가에서 길 안쪽으로 더 들어와야 식당이나 커피숍이 있어서 편의 시설 이용이 다소 불편함. 광안리에 비해 이쪽 월세가 좀 더 비싸니 물가도 더 비싸게 느껴짐. 다만, 고급 호텔이 많아서 고급 호텔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주로 해운대에 감.
(2) 광안리: 바닷가 바로 앞에 가게들이 많음. 물에서 좀 놀다가 바로 커피 한잔 사 먹기도 광안리가 훨씬 편하고 좋음. 광안대교도 있고 드론쇼도 인기 많음. 고급 호텔이 없지만 해운대와 멀지 않기 때문에 호텔만 해운대에 잡아놓고 노는 건 광안리에서 놀아도 됨.
광안리의 장점에 치우친 설명인 것 같아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혹시 광안리에 사세요?"하고 여쭤봤다. 기사님은 껄껄 웃으며 다른 데 살고 있다는 대답과 함께 사람들이 거주지로서 광안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변화에 대해서도(다른 말로 광안리 집값 변화) 알려주셨다. 우리 숙소가 해운대에 있는 호텔이란 말에 광안대교도 안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셨는지, 광안대교 야경을 볼 수 있는 요트 투어를 해보라고 추천하셨다. 이미 요트 투어 예약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하자 (광안대교 야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인지 체크하기 위해) 몇 시로 예약했는지, 얼마 주고 했는지를 물어보고 그 가격이 적정 가격인지 판단해주시기도 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택시에 타고 있던 6~7분 안에 들었다. 책방골목이 조금 더 멀었다면 분명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테다. 나는 짧은 승차 시간을 아쉽게 느끼며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린 중2는 기사님과의 대화에서 자기 분량이 없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평소 낯선 어른과의 대화라면 최대한 피하기 바쁜 중학생 눈에도 그 친근한 기사님은 꽤나 좋아보였나 보다. 여행지에서는 택시 기사님과의 대화도 여행의 한 부분으로 충분히 작용하는구나를 느끼며 우리는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골목 입구에 우리를 내려주고 떠난 기사님과 달리, 기사님의 말은 아직 떠나지 않은 듯 보였다. '거기 문 닫은 가게가 많을 건데'라는 기사님의 말이 실사판으로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골목에 들어서면서 가장 많이 보이는 건 문 닫은 서점들이었다. 책을 진열해 두었던 곳임을 짐작케 하는 텅 빈 철제 진열대 뒤로 굳게 닫힌 셔터문이 보였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몰라도 골목에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본인 학창 시절만 해도 책방 골목에 문제집 사러 많이들 가곤 했지만 요즘은 다들 인터넷으로 책 사지 누가 중고서점 와서 사냐고 말하던 기사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는 듯했다.
나는 책방골목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서적 유통업 종사자도 아니며 이 골목의 유동인구가 줄어드는 걸 걱정해야 하는 이해관계라고는 1g도 없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책방골목의 한산함이 속상했다. 생전 처음으로 여기 방문한 사람의 속상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때 번성했으나 쇠락의 양상을 보이는 곳이 비단 여기 책방골목뿐이랴. 40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건 쇠락의 길을 걷는 무언가를 보며 가슴 아파했던 경험을 그만큼 쌓아왔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니 부산 시민도 아닌 주제에, 책방골목 관계자도 아닌 주제에, 이곳의 쇠락을 목도하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혈기왕성했던 부모님의 노쇠한 모습을 보며 느끼는 아픔이나 내가 자주 가던 가게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폐업했을 때 느꼈던 쓸쓸함 등이 쌓인 내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리기에.
쇠락에 관한 40대의 감상을 멈추게 한 건 봄 춘(春)을 품은 시기인 사춘기로 빛나는 10대 중학생이었다. 딸아이는 책방골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큰 서점으로 나를 이끌며 그곳에 들어가 보자고 했다. 따뜻한 느낌의 조명과 안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큰 유리문이 이 서점의 분위기를 다른 곳과 차별화시켰다. 아이는 이곳의 분위기에 이끌린 듯, 다른 곳에서라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몇 권을 뽑아 들춰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위로 가지런히 꽂힌 세계문학전집이 아우라를 풍기며 아이의 시선을 끌어줘서 고마웠다.
1층과 지하층을 슬쩍 둘러본 뒤 더 많은 금액을 결제하지 못하여 죄송한 마음으로 17,000원이 적힌 영수증을 받아 들고 이곳을 나왔다. 그리고 책방골목 사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쓸신잡3 부산편에 나온 이곳을 보며, 언젠가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게 된다면 나도 저 사진관에 가보겠노라 생각했었다. 이번 부산여행을 계획하며 나는 책방골목 사진관 예약부터 완료했었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로 꼬아보세요."
"눈을 찡긋 감고 크게 웃어보세요."
"마음에 드는 책 아무 거나 골라서 읽는 척해보세요."
"책을 머리 위로 올려보세요."
벽면이 모두 책으로 가득한 사진관에서 작가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그의 포즈 지도는 명확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몇 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내는 것이 이 분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작가님의 "이렇게 해보세요"에 발맞추어 열심히 포즈를 취해야만 했다.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이 카메라 앞에서 갖는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희석시켜 주기 위해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촬영을 이끌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경쾌한 목소리에 아련한 분위기 한 스푼을 얹어 이렇게 말했다.
"중학생 데리고 이렇게 다니시고... 근데 10년 뒤에는 말이죠, 애가 엄마 모시고 여기 다시 올 거예요."
서로를 조금 더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진을 찍기 위한 프로 작가님으로서의 멘트일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을 듣는 내 마음은 속절없이 몽글몽글해져 버렸다. 20대 중반이 된 아이와 50대 중반이 된 내가 다시 이 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으며 "우리 10년 전에 여기 왔을 때 생각 나?"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만. 성인이 된 아이가 자기 친구랑 놀기 바쁘겠지, 50대 엄마와 이런 곳에 다시 올 생각을 할까? 그리고 이 사진관은 과연 10년 뒤에도 여기 있을까? 책방골목 사진관은 책방골목의 운명과 함께 할 텐데, 책방골목이 여기서 더 쇠락하면 어쩌지.
아무래도 10년 뒤 애가 나를 데려오기 전에 2~3년마다 한 번씩 여기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뒤엔 오늘 일을 잊어버릴 확률이 크지만, 그 사이 2~3년마다 한 번씩 온다면 잊어버릴 확률이 점점 낮아질 테니까. 그리고 책방골목이 계속해서 건재하길 바라는 한 명으로서 이 골목의 여전함을 2~3년마다는 확인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2차로 잠깐만. 지금부터 2~3년 뒤라면 얘는 고등학생인데? 고등학생인 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번 여행의 이유가 떠올랐다. 나는 사진관을 나서며 이미 검색해 둔 '전쟁통에도 식지 않은 교육열'에 관한 기사를 주섬주섬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