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내 어린 시절 일기장을 보여준 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딸이 나온다는 소개에 이끌려 <우리들의 짭조름한 여름날>을 집어 들 때만 해도 몰랐다. 독후활동을 위해 케케묵은 내 일기장을 꺼내게 될 줄은. 그리고 30년 전 일기를 읽는 것에 이런 예상치 못한 효과가 있는 줄은.
<우리들의 짭조름한 여름날>은 유쾌한 청소년 소설이다. 오래간만에 아이와 나 둘 다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독후활동으로 연결해보고 싶었다. 어떤 활동이 좋을지 고민하다 주인공이 엄마의 학창 시절 일기장을 발견하는 페이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래, 일기장. 초등학교 시절에 쓴 내 일기장을 보여주자.
아이가 내 일기를 보고 '아, 우리 엄마는 이렇게나 열심히 공부를 했구나. 나도 엄마를 본받아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몇십 년 만에 꺼내는 일기장이라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40대가 30년에 쓴 전 일기를 읽어봄으로써 아이가 인간의 생애주기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길 바랐다. 그러니까 '네가 언제까지나 13살일 줄 아니? 일기장 속의 어린이가 어느새 이 나이가 된 거 봐봐. 그러니까 미래를 위해 공부하렴!' 하는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자주 꺼내지 않는 물건은 깊숙이 보관해도 좋다는 정리 수칙에 따라, 나의 예전 일기장들은 낑낑거리며 손을 뻗어야만 꺼낼 수 있는 공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지간히 큰 마음을 먹지 않는 다음에야 꺼낼 일이 없는 박스였지만 나는 아이와의 독후활동을 위해 그 큰 마음을 먹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엔 매일 일기 쓰기가 숙제였는지 일기장이 제법 많았다. 그림일기를 쓰던 저학년 시절을 빼면 한 학년마다 열 권쯤 되는 일기장들. 어머, 내가 생각보다 꽤 성실한 모범생이었나? 잠시 설레어하며 일기장을 펼쳤다. 그런데 웬걸. 뭐 그리 하기 싫은 것이 많은지, 일기장엔 온통 '공부하기 싫다', '숙제하기 싫다', '가족 외식이 싫다', '중학교 가기 싫다' 등등 '싫다' 천국이었다. 심지어 '일기 쓰기 싫다'까지. 적어도 아이가 내 일기를 읽고 자신과 비교하며 주눅 들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아이는 웃긴 만화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내 일기장을 읽어 내려갔다.
"엄마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었어? 선생님이 검사하는 일기장에다가 대놓고 공부하기 싫다고 쓰면 어떡해? 어이구... 쯧쯧..."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와 공유하는 노션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기록을 도와줄 몇 가지 질문을 적어두었다.
공부하기 싫다는 말로 일기장에 도배를 하던 초6이 자라서 공부 예찬론자인 40대가 되었다. 아이가 이걸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며 적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일기장에 나오는 6학년의 모습에서 지금 엄마의 모습을 찾을 수 있나요? 있다면 어떤 점을 찾을 수 있나요? 없다면 어떻게 달라진 것 같나요?
2) 만약 6학년인 엄마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30년 뒤에 너는 ***하게 살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 ****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줄 것 같나요?
3) 그렇다면, 30년 뒤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와서 "30년 뒤에 너는 ***하게 살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 ****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한다면 어떤 말을 할 것 같나요?
선생님이 검사하는 일기장에 '공부하기 싫다'는 말을 썼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눈치가 없었던 게 아니냐던 딸은, 엄마와 공유하는 노션 페이지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는 모범 답안을 써두었다. 그저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썼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번 기회에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며 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둘 중 어느 쪽이든 크게 개의치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내가 초6일 때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를 봤기 때문이다.
다시 박스에 넣어두려고 했던 일기장은 책장 한편에 꽂아두었다.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이 조급해질 때마다 꺼내서 읽을 요량이었다. 어린 시절에 쓴 일기를 통해 아이를 보는 내 시선이 너그러워질 줄은 몰랐다. 우리의 첫 번째 독후활동을 통해 아이 공부에 대한 조급증이 누그러지다니,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게 며칠이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너그러운 상태를 즐기기로 했다. 그다음 독후활동을 기대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