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PM의 스타트업 도전기
벌써 일곱 번째 이직이다. 이력서를 칸칸이 살펴보니 평균 2년 정도 다니다가 회사를 옮겼다.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했다고는 하지만, 기간을 생각하더라도 이직 횟수가 적지는 않은 편이다. 이번에 회사를 옮기려고 준비하면서 도대체 왜 이렇게 나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고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근무 강도가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대기업이 첫 회사였기 때문에 한 번도 주어진 일이 너무 과중해서 회사를 그만둔 적은 없었다. 즉 이직 사유가 업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다. 아무래도 이제 한 가지 직업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는 시대이기도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으며, 회사에 소속되어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짧다는 게 이직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한정된 시간 동안 다양한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마음이 내 이력서를 이렇게 길게 만든 것 같다.
이번에 이력서를 찬찬히 보니 그 당시의 내가 뭘 최우선으로 두고 직장을 구했는지가 보였다. 그 당시의 여느 대기업이 그랬듯 정리해고가 연례행사였던 첫 회사 이후로 나는 안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공사, 공공기관 등 정년이 보장된 직장을 주로 선택해왔다. 그렇게 원하던 안정을 손에 넣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답답했다. 근무 시간도 일도 굉장히 여유로웠지만 급여는 여유롭지 못했던 것도 이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러나저러나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을 할 거라면 적당한 강도의 일과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첫 회사에서처럼 내년에 내가 회사에 남아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갈수록 내가 고를 수 있는 회사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1년을 못 채운 이유
지금까지와 다른 기준으로 회사를 고르게 된 계기는 직전에 다녔던 출판사였다. 출판계의 공공기관 같은 느낌의 회사였는데, 입사하면서 나는 직원들의 평균 근속 연수가 20년이라는 것에 크게 안심했다. 일도 적당하고 적성에도 맞고 급여도 약간은 늘었으니 나도 여기서 정년을 맞이하겠구나, 드디어 이직도 끝이구나, 하며 마음을 놨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속한 부서만 이상하게도 1년 미만의 직원들이 90% 이상이었는데, 그 사실을 입사 전에 알았더라면 나는 그 회사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그곳은 공기업의 단점과 사기업의 단점이 공존하는 신기한 곳이었다. 사기업치고는 흔치 않게 발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곳이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참신하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하지만 새로운 기획은 마뜩잖아 하는 곳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속했던 부서를 20년 동안이나 이끌었던 부서장은 놀라울 정도로 일을 몰랐고, 할 마음이 없었다. 재직 기간 1년 미만의 팀원들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져오라는 부서장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왜 이렇게 평화로운 회사에서 우리 부서만 퇴직자가 그렇게 자주, 많이 나오는지를 입사 한 달만에 알았다. 사기업도 공기업도 아닌 애매한 느낌의 일터에서는 급여나 보상으로 스트레스를 커버할 수 없었고, 나는 점점 조직생활에 환멸이 났다. 40대 이후로 계획했던 1인 기업을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할까 생각을 하던 중, 딱 알맞은 타이밍에 헤드헌터로부터 제안이 날아왔다.
여기 스타트업 맞나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기에 1인 기업에 바로 도전을 할 수는 없고, 그걸 위해 내가 어떤 역량을 더 키워야 할까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일 전체를 기획부터 완성, 회고까지 해내는 능력이 필요할 것 같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타트업처럼 일당백을 해내야 하는 회사에서 훈련을 하는 게 좋을까 싶었다. 그러자니 이미 나이도 경력도 애매한 나에게 기회가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바로 그 타이밍에 헤드헌터로부터 제안이 날아들었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해서 빠른 성장세를 이루고 있는 회사의 PM 포지션이었다. 직군은 다양했지만 크게 교육 콘텐츠와 출판 기획이라는 키워드로 정리가 되는 내 커리어가 딱 알맞다는 것이 제안의 이유였다.
두 번의 심층 면접과 역량 테스트를 거쳐 운 좋게 희망 연봉을 맞춰서 나는 이번 회사에 합격했다. 입사를 하고 나서 처음 일주일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내가 안정적인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 동안 많은 스타트업은 이렇게 빠르게 커나가고 있었구나, 이렇게 구성원들이 다 열정적일 수도 있구나 하며 놀랐다. 더불어 생전 써본 적 없는, 그러나 다들 쓰고 있는 슬랙이니 G-suite니 하는 것들에 적응해야 했다. 그동안은 회의할 때마다 서류를 한가득 싸들고 수첩에 필기도구에 한 짐을 챙겨서 회의실로 갔었는데, 여기서는 노트북만 달랑 들고 들어가는 것도 새로웠다. 습관적으로 입사 첫날 프린트 설치부터 했는데, 한 달 동안 종이 서류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PM이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범위가 넓다 못해 거의 사업 전체라는 것에도 놀랐다. 그중 내가 제일 어렵게 느꼈던 것은 시장조사였다. 물론 출판사에서도 시장조사는 나름 여러 번 해봤지만, 규모도 방법도 아예 달랐다. 홧김에 1인 기업을 하겠다고 바로 나섰으면 뭐가 될뻔했구나…를 실시간으로 느꼈다. 입사 한 달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니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들에서는 3개월에 걸쳐 익혔던 걸 여기선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다 익혀야 했다. 의사 결정도 업무 속도도 눈이 돌아가게 빨랐고, 갑자기 끼어드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도 다들 우는 소리나 불평 없이 척척 맡은 일을 해내면서 신입인 나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이제 스타트업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커질 만큼 커져서 덩치에 맞는 체계를 갖추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작은 사무실에서 3명이 시작했던 작은 회사는 이제 직원이 500명쯤 되고, 강남의 멋진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3명일 때보다는 의사결정 과정이 차근차근 체계를 갖추는 중이겠지만, 공기업을 경험한 나에게는 아직도 의사결정이며 업무 진행이며 모든 게 (지나치게) 빠른 느낌이다. 체계가 어느 정도 잡혀있는 스타트업에서도 적응이 이렇게 힘든데 찐 스타트업에 갔으면 나는 적응을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했다. 원래 돌아가고 있는 일에, 새로 껴들어오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사람들은 모두 근무 시간 내내 바쁘다. 점심을 먹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가 고개를 잠깐 들면 이미 퇴근 시간이 임박한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수습도 끝나기 전에 생각하는 다음 스텝
그동안 어느 회사든 면접을 보러 가면 우리는 오래 같이 일할 사람을 원한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이직이 잦은 나로서는 면접장에서 들으면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 회사는 달랐다. 면접에서 대표는 나에게 5년 뒤의 계획에 대해 물었고 물었고, 그 청사진에 보탬이 되도록 이 회사에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과 내가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조율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가 특이한지 모든 스타트업이 이런지는 몰라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같이 일하는 동안은 회사랑 내가 같이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대표의 말이 그저 빈말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적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얼마나 다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여기가 마지막 직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좋든 싫든 이제 한 가지 직업으로 평생을 살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아직도 내 새로운 역할인 PM이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무엇의 약자인지 정도만 답할 수 있고 정확하게 뭘 하는 사람인지 설명할 자신이 없다. 심지어 무엇의 약자인지도 정확하지 않았던 게, 명함을 받고 나서야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가 아닌 프로덕트 매니저라는 걸 알았다. 사무실에 있는 PM들을 보면 둘의 차이를 두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다 커버하는 사람들이었다. 열정 넘치게 일하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으니, 나까지 같이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면서 일하고 있다. 이다음에는 혼자서 일을 하게 될지 또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로젝트든 프로덕트든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해보고 무엇인가를 얻어서 다음 스텝을 밟아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