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제법 많이 온다.
계속 집에만 있다가 모처럼 에이를 만나는 날 비가 종일 내린다.
그럴 수도 있지.
한동안 약을 먹어야 해서 하루에 네 번 꼬박 챙겨 먹었어야 해서 약에 취했어서 두문불출하다가 외출하는 날.
에이가 사과 세 알을 갖고 나왔다.
집에 돌아와 사과를 보고 있는데 사과가 이렇게 예쁠 수가.
나도 가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는 날이 있고 이렇게 적어놓고 싶은 날도 생겼다.
신기하지, 사람의 일이란.
정한 대로 되지 않고.
늘 변한다.
변하는 건 당연한 것인데.
이젠 블로그도 인스타도 스레드도 하고 싶은 말 줄줄 쓸 수 없다.
업과 관계되어 있고 거기다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순 없으니까.
속마음 겉마음 다른가 따진다면 나는 속 다르고 겉 다른 인간임도 인정하고 수용하고 싶다.
난 그냥 그저 그런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다.
훌륭해지고 싶지도 않고.
그냥 살다가 자다가 죽고 싶다.
오늘은 에이랑 음악을 들었다.
밖에 빗소리와 첼로 소리가 참 절묘하더라.
한 이십 명쯤 있었고 주인장의 선곡이 훌륭해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세상 좋은 일 하는 사람 아주 많구나.
좋아하는 일 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욕심 안 부리고.
좋은 음악을 듣고 앉아있으니 든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조금만 알걸 그랬지.
너무 많이 알고 다 알려고 했었다.
그냥 조금만 알걸.
알려고도 하지 말 걸.
산도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보고서야 밑이 안 보인다는 걸 알고선 허탈해졌듯.
왜 나는 다 알고 싶었던 걸까.
욕심 때문이었을 거다.
오십 년 넘게 살고서 내가 욕심이 넘치는 인간이란 걸 알았다.
스스로가 어리석어 눈물이 났어.
이제부터 욕심 안 부릴 자신도 없으니 더 눈물이 났다.
막막함이란 이런 걸 거다.
오늘도 음악을 듣고 앉았다가 지난날 욕심과 만난 거지.
만나면 괴로워지는 거야.
회피하면 만남이 늦어지니까 괴로움은 더 커지는 거고.
내일 아침 에이가 준 사과 먹을 생각에 이 밤이 조금 좋긴 하고.
지난날 나의 욕심을 목도한 괴로움은 빗소리에 흘려보내야지.
평생 괴로웠어서 괴로움에 적응도 될 만 한데...
어리석다 인정하자, 그러면 덜 괴로워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