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퓨전의 철학
우리는 종종 '퓨전'이라는 말을 오해한다. 서로 다른 것을 단순히 섞어놓은 것, 혹은 전통을 희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섞다 보면 본래의 정체성이 흐려질 것을 우려하는 듯하다. 하지만 진정한 퓨전은 뿌리 깊은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여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과정이다.
한국인에게 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밥 먹었어요?"라는 인사말에는 상대방의 안녕을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있고, "밥심"이라는 표현에는 우리 민족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특히 우리 어머니 세대에게 밥을 짓는 일은 하나의 의례였다. 쌀을 일곱 번 씻어 정성껏 안친 다음, 뜸을 들이는 시간까지 모든 과정에는 깊은 애정과 철학이 담겨있었다. 이런 깊이 뿌리내린 정체성이야말로 진정한 퓨전의 출발점이 된다.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와 마주한다. 파리의 비스트로에서 만난 프랑스의 미학적 섬세함, 도쿄의 스시집에서 배운 식재료에 대한 경외심, 상하이의 시장에서 발견한 영양학적 지혜, 스톡홀름의 식당가에서 목격한 지속가능한 식문화까지. 이러한 만남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나는 스웨덴에서 요리를 하며 이러한 진실을 더욱 깊이 깨달았다. 스웨덴에서 사귄 다양한 국적과 문화권의 사람들과 함께 요리하면서 우리 음식의 철학을 나누었고 각각의 식문화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나누었다. 그들은 내 음식에 호기심을 보였고, 나는 그들의 전통 요리를 배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고, 새로운 맛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퓨전은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는 순간의 긴장감을 피하지 않는다. 캐비어가 쌀밥 위에 놓이는 순간, 된장이 파스타 면과 만나는 순간, 거기에는 미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바로 그 긴장의 순간이 새로운 맛의 지평을 여는 창조의 순간이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세계 속에서 정체성을 협상해나가는 과정과도 닮아있다.
퓨전의 진정한 가치는 경계에 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지역성과 세계성이 만나는 그 경계선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김치와 모짜렐라 치즈가 만나 피자의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내고, 된장이 스테이크 소스가 되어 umami의 깊이를 더하는 것처럼. 이러한 경계의 실험은 우리의 문화적 지평을 넓히는 동시에,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균형은 중요하다. 너무 전통에 매몰되면 화석화되고, 너무 새로움만을 쫓으면 뿌리 없는 실험이 된다. 중요한 것은 전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능력이다. 이는 마치 茶道에서 말하는 '和敬淸寂'의 정신과도 통한다. 조화(和)를 이루되 서로를 존중하고(敬), 본질은 맑게 유지하며(淸), 그 속에서 고요한 아름다움(寂)을 찾아가는 것이다.
결국 퓨전의 철학은 열린 대화의 철학이다. 그것은 전통과 현대가, 동양과 서양이, 지역과 세계가 나누는 끝없는 대화다. 이 대화는 때로는 불편할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만나고, 더 깊은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