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현 Aug 15. 2021

인어왕자가 사랑한 윤슬

- 다시 쓰는 안데르센 명작, 인어공주

동해 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인어왕의 막내아들, 인어왕자 선호는 오늘도 형들 몰래 바다 위로 나갑니다. 인어왕인 어머니와 6명의 형들은 바다 위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사람을 만나면 큰일난다고 언제나 말해주었지만 인어왕자는 찬란한 햇빛이 물결 위에 부딪혀 반짝반짝 부서지는 걸 보는 것이 좋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인어왕자는 또 바다 위로 올라갔다가 요트 한 척을 보게 됐어요. 요트 위에는 수면에 부서지는 햇빛만큼 찬란하게 웃고 있는 공주님이 있었고, 인어왕자는 첫눈에 반했답니다. 공주님의 요트로 몰래 다가간 인어왕자는 공기 중에 울려 퍼지는 구슬 같은 공주님의 웃음소리와 햇살같이 반짝이는 미소를 따라 결국 요트가 정박한 해안가까지 따라갔어요. 멀리 사라지는 공주님을 보며 인어왕자는 꼭 공주님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 후로 매일 저녁, 인어왕자는 공주님을 찾아 바다 위로 올라갔고 공주님은 매일 저녁 친구들과 함께 요트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거나, 바닷가 근처 바위에 혼자 앉아 책을 읽었어요.



바다 위 육지에 대한 갈망과 육지의 공주님 생각에 날이 갈수록 인어왕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살지만 바다 속 세상은 단조롭고 재미가 없는데 비해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인어보다는 짧게 살지만 영혼을 가지고 영원할 것처럼 생명력을 뿜어내며 사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육지 가까이에서 사람을 구해주었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직 슬퍼하고 분노하는 어머니와 6명의 형들에게는 절대 이 꿈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서만 끙끙 앓던 인어왕자는 동해 바다 깊숙한 동굴에 사는 마법사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아주 오래 전에 저 먼 바다에서 선호 같은 어린 인어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 인어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물거품이 되었다고 하지만 인어왕자는 육지의 뜨거운 태양빛과 그만큼 강렬한 사람들의 생명력과 열정을 가질 수 있다면, 영혼을 가지고 영원을 꿈꿀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는 동해 인어왕의 막내 왕자 아니냐, 이 곳엔 무슨 일이지?” 마법사는 인어왕자를 힐끗 보더니 뻔하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저는…. 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어왕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입 밖으로 꺼냈습니다.

“너도 사람이 되고 싶다던 인어공주가 어떻게 됐는지 들었을텐데?” 

“알아요. 하지만… 저는 실패하더라도 사람이 되어서 영원히 사는 영혼을 가지고 싶고, 열정적으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살아보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제가 결정한 주체적인 삶을 꿈꾸고 말해본 적도, 살아본 적도 없거든요, 부끄럽지만.” 인어왕자는 처음 만난 마법사에게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툭하고 털어놓았습니다. 

“좋아, 다리를 얻으려면 너도 무언가를 내놓아야 해. 너도 예전 그 인어처럼 목소리를 내놓을테

냐?” 마법사는 인어왕자를 꿰뚫을 것 같이 응시했습니다. 

“저는.. 저는…” 인어왕자가 망설이자 마법사는 무엇을 받을지 직접 정했습니다. 

“그럼 네 놈의 눈물을 내놓아라. 넌 이제 어떤 순간에도 울지 못 할거야. 인간의 눈물은 인어의 

눈물처럼 값진 보석 취급 받는 눈물과는 달라. 인간들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지만 가장 인간적

인 것이 눈물이야.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고통과 후회를 씻어내는 진통제가 되기도 하지.”

“알겠어요. 눈물을 드릴 테니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마법사가 건넨 약을 들고 가슴이 벅차도록 헤엄쳐 수면이 가까워졌을 때 인어왕자는 약을 한 입

에 꿀꺽 삼켰습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정신이 좀 드시나요?”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눈을 뜬 인어왕자의 눈 앞에는 그토록 다시 만나길 꿈꿨던 공주님이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계셔서 제가 병원으로 모시고 왔어요.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공주님은 바닷가에 쓰러져있는 인어왕자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이름을 제외하고는 집도, 가족도, 직업도 말하지 못하는 인어왕자에게 공주님은 지낼만한 집을 선뜻 구해주었습니다. 육지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인어왕자는 보물 같은 목소리를 활용해 성우가 되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필사적으로 인간 세상에 적응하며 공주님과도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가끔은 편하고 안락한 바다 속이 그립기도 했어요. 그런 날이면 인어왕자는 바닷가를 산책했는데, 하루는 6명의 형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막내를 찾아 바닷가까지 왔습니다. 형들은 막내에게 독약을 묻힌 단검을 건넸습니다. 

“만일 공주가 널 사랑하지 않으면 이 검으로 가슴을 찔러. 그래야 네가 물거품이 되지 않을 수 있어!” 큰 형이 말했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너까지 인간에게 잃을 수는 없다, 선호야.” 평소에 가장 많이 붙어 다녔던 여섯 째 형이 덧붙였어요. 인기척이 들리자 형들은 다시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인어왕자의 바람과 달리 결심을 해야 할 순간은 너무나 빨리 다가왔습니다. 공주님이 오랜 기간

만난 남자친구와 곧 결혼을 한다고 했습니다. 공주님과 이제 많이 가까워져 마음을 고백해야겠다

는 결심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눈물을 잃어버린 인어왕자는 절망과 고통으로 무

너진 마음을 안고 몸부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혼식 일주일 전, 인어왕자는 자신이 그 옛날의 

인어공주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찌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공주님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윤슬씨, 저는 이제 곧 떠나야 해요.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바닷속에 사는 인어예요. 어느 날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빛이 아름다워 구경하다가 윤슬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마법사를 찾아서 이렇게, 사람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바다로 다시 돌아가야 해요. 그 동안 저를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이름 그대로 윤슬씨는 수면에 반짝이는 햇빛같이 아름답고 좋은 사람이에요.”

공주님은 혼란스러워 돌아서는 인어왕자를 잡지 못했고, 인어왕자는 처음으로 용기 있게 선택한 자신의 삶과 사랑을 고백했던 자신을 향해 웃어주며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법사의 배려였을까요? 바다에 뛰어들자 다리는 다시 미끈한 꼬리로 바뀌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삶을 떠올리며 그리움과 공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어왕자는 매일 밤 고통스럽지만 눈물을 흘리지 못하며 밤을 지샜습니다. 어느덧 동해 바다의 마음 여리고 순종적인 인어왕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장점을 발전시키고 삶을 개척해나가는 동해 바다의 하나뿐인 성우가 되어 모든 안내방송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공주님은 결혼식을 취소하고 한참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 인어왕자를 찾아 다녔습니다. 처음 만났던 바닷가에 매일 습관처럼 나갔지만 인어왕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해맑고 따뜻한 눈빛의 인어왕자가 했던 말들이 계속 떠올라 공주님은 심장이 하루도 얌전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모든 것에 서툴지만 열정적인 파도를 닮은 눈동자를 가진 인어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요.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공주님은 바닷가로 달려가서 얼굴에 마구 흐르는 눈물을 무시한 채 무작정 외쳤습니다. 혹시라도 인어왕자가 듣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선호씨, 사랑해요! 나도 선호씨를 사랑하게 됐어요!”


한참을 울던 공주님의 뒤에서 파도냄새와 함께 따뜻한 체온이 공주님을 감싸 안았습니다. 



진정한 삶을 찾은 인어왕자와 그가 사랑하는 수면에 부서지는 햇빛 같은 공주님, 윤슬은 기쁜 날도 함께, 힘든 날도 함께 지지고 볶으며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 못생겼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