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A라는 친구가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동그랗고, 이름을 떠올리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 생각나는 친구였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녔지만 속이 아주 깊고 넓어서, 언제나 작은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며 좋은 글귀들을 적어 두고 때로는 친구들에게 예쁜 종이에 시 한 편을 그리듯 써서 선물해주곤 했다.
2007년 다이어리 한 편에 적은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그 친구에게 받은 시였다. 나는 글 읽기를 좋아하지만 고등학교 문예부 활동 이후로시를 읽고 감상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때 아주 오랜만에시를 옮겨 쓰고여러 번 읽고, 또 다른 소중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 글에 시를 적어 주기도 했다.
A와 내가 재수 학원에서 만나 그깟 모의고사 점수에 일희일비하던 시절도 꽃봉오리였고, 각자 먹고살 길을 찾아보겠다고 이런저런 시험을 준비하며 도서관에 박혀 있던 대학 시절도 꽃봉오리였다. 그 순간들을 꽃봉오리처럼 여기고, 노다지처럼 여기고, 더 열심히 파고들고 귀 기울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일기를 쓴 날은 암 진단을 받아 병원에 입원하신 외할아버지를 뵙고 온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평소 말씀이 거의 없으셨는데, 손자들이 오면 지게처럼 생긴 망태기를 등에 메고 바다에 가셔서는, 소라며 꽃게 같은 것을 한 바구니 잡아 오셨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살가운 손녀는 아니었지만,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늘 좋아했다. 내 기억에 그냥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긴 했지만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어 다가가지 못한 그런 사이였다.
의연한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갔지만 곧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다. 울적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으셨는지 내가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셨고, 할아버지는 나를 보면서 ‘아이고 축하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거의 처음으로 서로를 온전히 마주 보면서 밝게 웃은 날일 것이다. 법학과에 진학해서 고시공부를 하려는데 성적장학금도 받았다 했으니,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곧 판검사가 되겠구나, 하셨을 것이고 두 분이 계실 때 시험에 붙어야지, 하면서 썼던 일기였다.
“정말이다. 정말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다. 몰랐던 바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 말이 아주 아릿하게 느껴지는구나. 이제 모든 일을 남은 시간에 분배하여해나가야 한다. 내게 남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분들에게 남은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사람의 몸이 신비로울진 몰라도 영원하진 못하다. 세상 모든 것이영원하지 못한 것처럼. 의사들이 유능할지는 몰라도 전능하지는 않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그러한 것처럼. 그래서 아주 촉박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시간을 맞추어 보면.”
하지만 나는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하지 못했다. 그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은 알았지만 피어날 정도로 열심을 다하지 못했다. 그렇게 할아버지께서는 머지않아 돌아가셨고, 결국 나는 몇 년 후 고시공부를 그만두었다.
그 시절은 진짜 꽃봉오리였다. 내 열심을 다해 몰두하여 꽃을 피웠어야 하는 꽃봉오리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직장생활을 시작해 사람들과 어우러져 일을 해온 순간들도 꽃봉오리였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이 꽃봉오리였다. 어떤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따져볼 순 없지만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하고 몰두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후회는 가끔, 아주 짧게만 한다. 꽃봉오리를 피우지 못해 아쉬운 순간이야 많지만, 꽃봉오리도 봉오리 그 자체로 귀엽고 예쁜 구석이 분명 있으니.피우지 못하고 넘어간 시간을 너무 후회하거나 자책하지는 말아야지. 이미 져버린 꽃봉오리에 미련을 두지는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