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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스 May 17. 2022

품격 있는 백수 #1

진작에 결심이 아닌 각오를 했어야 했다.

2020년 12월 31일 삼락공원 낙조


2020년 12월 31일 삼락 공원 낙조는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장면이었다.  2년 남짓 삼락 공원을 걸으면서 이렇게 신비로운 낙조는 처음이었다.

감사한 분들께 사진을 보내드렸다.  


한참 술에 찌들어 있을 때,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우편물이 왔다. 나는 못 본 체 넘겼지만, 오마님이 가보라고 길게 얘기했다. 길게 얘기했다는 건 2년 백수로 지내며 하셨던 물음보다 훨씬 많은 말씀을 하셨다. 양으로 따지자면 말이다. 안방으로 불러 잠시 앉아 보라고 하곤, 지금까지 내가 잔소리한 적 있냐라는 말부터 시작해 2년 동안 꾹 참았던 얘기를 한꺼번에 쏟아 내셨다. 쉽게 건방 떨지 못하고 알겠다고  말하곤 술을 사러 나갔다.


검사 결과는 역류성 식도염과 심한 위궤양 그리고 당뇨였다. 처음본 의사는  지나치게 내 건강을 염려 하는거 같았다. 그래서  충격적이게 겁을 줬다. 장사 속이었는지, 뭔가의 속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방전을 가지고 간 약국에선 약사도 의사와 비슷한 말을 했다. 약사는 많은 약을 하얀 봉지에 꽉꽉 눌러 담아줬다. 평생 먹었던 약 보다 많았다. 식후 30분 후 알뜰히 챙겨 먹으라고 했다.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약을 보여주고, 술을 사러 나갔다.


보려고 한 하늘이 아닌데 시선이 하늘이 닿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파랬다. 구름은 붉은빛이

었다. 내가 아는 구름의 색이 아니었다. 왼손에 까만 봉지를 들고, 오른손에 담배를 들고 구름이 빨개지

는 쪽으로 걸었다. 삼락공원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걸어왔던 걸음보다 빨라 보였다. 사람들 속도에 맞추어 걸었다. 까만 봉지 안에서 술병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숨이 찾다. 보이는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두워졌다. 두 팔을 세차게 흔들며 걷는 아줌마도,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도 사라졌다. 자전거에 매단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깜깜해졌다. 혼자인 거 같았다. 까만 봉지 속인 거  같았다. 울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무서웠는지도 모르겠

다. 지난 시간의 반성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디오

에서 나왔던 노래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랬

는지 모르겠다. 한 순간에 스친 생각들이 먼저였는

지, 눈물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난 까만 봉지 속

에서 컥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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