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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Jan 22. 2024

흩어진 마음

나이를 먹으면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어질 줄 알았다. 또 가족 외에도 남은 인생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사람들이 주변에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동안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일들은 작은 가슴으로 넉넉하게 품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고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 왔기에 나이 들어 만날 사람이 많지 않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많은 이들의 전화번호가 그것을 보증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경로 대접을 받는 나이가 되어보니까 생각과는 정반대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태평양처럼 마음이 넓어지기는커녕 밴댕이 소갈딱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가끔은 전엔 안 그랬는데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별거 아닌 데도 서운한 이야기를 들으면 허허 웃어넘기던 예전과 달리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것처럼 마음에 상처가 남는다. 어찌 된 일인지 한 번 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세워보진 않았지만, 꽤 많다. 그렇지만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막상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걸 알게 된다. 이미 인연이 끊어진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그저 이름만 남은 사람, 선뜻 전화 걸기가 왠지 어색한 사람들의 이름이 지나온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치 학창 시절에 조선의 왕들을 순서대로 외우면서 그 시기를 이해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누군가 보고 싶으면 먼저 전화해야 하는데,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상대가 나를 잊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스스럼없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친한 대학 친구들은 만나고 싶어도 전국에 뚝뚝 떨어져 살고 있어 일 년에 몇 번씩 여행으로밖에 모이지 못한다. 졸업 인원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 초등학교와 전학으로 두 군데를 다닌 중학교 동창들은 아쉽게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친구들과 만나서 하는 이야기하는 중에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이 나이에 스트레스받을 게 뭐 있냐?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되고, 보기 싫은 놈 있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 누군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그럼! 하면서 다들 맞장구를 친다.


얼핏 들으면 틀린 말이 아니다. 나이 먹어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 말속에는 이만큼 살았으니 이젠 내 식대로 살겠다는 고집이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스스로 좁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한 거창한 말을 빌릴 것도 없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얽히고설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도 때론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안 보겠다는 건 세상을 등지고 살겠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 여러 종교가 있지만, 친숙한 건 불교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 수계를 받은 적이 없고, 정기적으로 절에 다니지도 않는다. 지금껏 절에 많이 갔지만, 법회에 참석해 본 적은 없다. 그러면서도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불교를 열심히 믿으셨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어려서부터 절에 많이 갔다. 또 가족들 모두 특별한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도 자연스럽게 불교와 친숙해졌다.


어느 지역을 여행하면 그곳에 있는 산사를 찾는다.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을 차분하고 여유롭게 해준다. 사찰에 있는 보물이니 국보니 하는 건 보아도 그만 안 보아도 그만이다. 대웅전에 들어가 어설프게나마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법당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경외감과 침묵의 경건함이 산사를 구경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길지 않은 시간 그렇게 앉았다 나오면 몸과 마음이 맑아진다.


딱히 불교 공부를 한 적은 없다. 법정 스님을 비롯해 몇몇 스님들이 쓴 산문을 좋아했다. 관심이 조금 더 커지면서 알기 쉽게 쓴 불교 서적을 몇 권 읽었다. 깊은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같이 좋은 말이고 가르침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좋은 말과 가르침이 너무 많아 온전히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책에서 읽은 많은 내용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닿는 건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 불교 공부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거울 보듯이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흔히들 세상살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이 말은 도를 이룬 고승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도 아는 것이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괴롭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다. 이런 경험은 살면서 누구나 한번은 자연스럽게 겪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시쳇말로 돈 드는 거 아니다. 그야말로 땡전 한 푼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나는 물론 대다수 사람이 그러지를 못한다. 남의 마음도 아니고,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데도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어렵다. 그렇다 보니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과 바람만 안고 산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나이를 먹고 보니 마음이 좁아지면서 전에 없던 뒤끝도 생긴다. 예전 같으면 화나는 일이 있어도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렸다. 이젠 그런 일이 생기면 가슴에 굵고 진한 흔적이 남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맞닥뜨렸던 수많은 일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해진 원칙과 결론이 머릿속에 두툼한 법전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원칙과 결론의 범위를 벗어난 상황을 맞이하면 화가 날 뿐만 아니라, 오래 가슴에 남는다. 이런 게 싫어 자유자재로는 아니더라도 그 화와 깊은 자국이 남지 않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마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고 오묘한지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서 알기 때문에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 


정년퇴직쯤에 다녔던 여행작가학교 동문 중에 딸 같은 어린 친구가 있다. 실제로 큰딸과 같은 나이이고,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다. 그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했기 때문에 동문 모임에서 만나면 늘 살갑게 굴었던 친구다. 다들 그랬듯이 코로나 시국에는 모임이나 여행이 중단되어 몇 년 동안 그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가끔은 잘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먼저 전화 걸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작년 말, 그 친구와 같은 기수의 후배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친구 소식을 물었더니 벌써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고 한다. 기특하고 대견해서 말 나온 김에 후배를 통해 그 친구와 통화를 했다. 나도 그랬지만,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친딸과 통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삼일이 지나 카톡으로 아이들 사진과 함께 꼭 한번 뵙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와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통화해서 안부를 주고받으면 반갑고 좋은데 왜 먼저 전화를 걸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정년퇴직할 때. 친한 후배가 한 말이 있다. “선배님! 이젠 선배라도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먼저 전화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잊지 않고 오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땐 그 말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는데, 이젠 그 말이 맞는다는 걸 실감한다. 보고 싶으면 상대가 누구든 먼저 전화해야 한다. 나이 먹었다고 또 선배랍시고 전화 오기만 기다리면 그만큼 더 고립되고 외로워질 뿐이다. 


새해 달력을 걸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도 하순에 접어들었다. 며칠 전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이때쯤 사람들은 신년 초의 계획이나 다짐을 다시 다잡는다고 한다. 신년 초에 세웠던 계획과 다짐이 작심삼일로 끝났기 때문에, 이 시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특별히 세운 계획은 없다. 이젠 나와 가족 모두 건강하고, 평온한 삶을 사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이제 거기에 마음 다스리는 공부와 보고 싶은 이들에게 먼저 전화하는 걸 다짐으로 보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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