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토박이다. 서울에서 보낸 세월의 흐름과 무게가 작지 않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았지만, 서울을 속속들이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어지간한 곳은 다 귀에 익고 눈에 익어있다. 서울 종로구에는 동묘(東廟)가 있다. 동묘 하면 오래전부터 주변에 있는 구제시장이 많이 알려져 있다. 구제시장은 외국에까지 알려져 외국인 관광객들도 줄지어 찾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이 동묘 하면 구제시장을 먼저 떠올린다. 사실 인터넷에서 동묘를 검색하면 동묘보다 구제시장 관련 글이 더 많이 뜬다.
구제시장에 밀려서인지 정작 동묘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다고 자부하는 나 역시도 동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들처럼 동묘 하면 그저 구제시장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동묘를 제대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아마 어떤 잡지에 실린 글을 통해 알지 않았나 싶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7~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은 젊어서 한 번쯤 무협지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거다. 그렇다 보니까 흥미진진한 역사소설인 삼국지나 수호지도 당연히 좋아했다. 삼국지는 젊었을 때, 세 번 정도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예전에는 남자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 중의 하나가 삼국지였고,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책장에는 한 권의 책으로 꾸며진 두툼한 삼국지가 꽂혀 있다. 그동안 책장을 수없이 정리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책을 버렸다. 그래도 삼국지만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삼국지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주요 인물은 유비, 관우, 장비가 아닐까 싶다.
세 명 중에서 좋아하는 캐릭터를 고르라고 하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관우를 꼽는다. 촉한의 황제가 된 유비보다 관우가 더 매력적이고 호감이 가는 인물이다. 충성심과 의리, 강직한 성품에다가 일당백의 용장인 관우는 남자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동묘는 바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좋아하는 역사의 인물이다 보니까 당연히 관심이 갔을 뿐만 아니라 동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우리나라 장군도 아니고, 남의 나라 장군을 모신 사당이 왜 있는 거지?’하는 의문이 생겼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주말을 맞아 관심과 의문을 풀어볼 생각으로 동묘에 갔다. 동묘 구제시장은 구경삼아 사진을 찍으려고 지인들과 서너 번 다녀왔다. 그래서인지 근래에 들어서는 가 본 적이 없고, 딱히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제는 사람들로 복잡한 곳은 딱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공짜로 넙죽넙죽 받아먹은 세월이 목구멍에 걸려서 그런지 사람 많아 번잡한 곳은 제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동묘의 구제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 규모가 더 커진 듯했고, 그만큼 사람도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턱 하니 숨이 막혔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도 있지만, 발 디딜 틈 없이 오가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좌판이 더 많은 것 같았고, 오가는 사람도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길가에 펼친 좌판은 동묘의 출입문인 외삼문까지 점령했다. 동묘를 드나드는 외삼문만 빼고 바로 문 옆까지 좌판들이 들어섰다.
괜히 왔다 싶을 정도로 복잡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듯이 동묘에 들어섰다. 동묘에 들어서면 담장 하나 사이로 안과 밖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걸 알 수 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담장 밖과 달리 동묘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전혀 다른 낯선 공간에 들어선 것 같은 분위기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동묘는 생각처럼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구제시장에 왔다가 잠시 발품을 쉬고 있는 분들이 많았고, 그들 속에 동묘를 구경 온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동묘는 언뜻 보면 우리의 옛 건축물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중국풍의 건물 형태와 분위기를 알아챌 수 있다. 동묘는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줄임말로 서울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이다. 관왕묘는 앞서 말했듯이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요청으로 선조 때 지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명나라의 요청으로 지었다는 대목에서 목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명나라가 순수한 마음으로 건립을 요청했을까? 그 이면에 어떤 의도나 의미가 없었을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압박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구심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동묘 관련 자료들을 보면 건립 과정에서부터 반대 목소리가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정황을 보면 나의 의구심은 합리적인 의구심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묘의 외삼문과 내삼문 그리고 중심 건물인 정전은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동무와 서무가 마주 보고 있다. 정전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 형태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누어져 있는데, 앞쪽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쪽은 관우와 부하 장군들의 조각상이 있는 본실이다.
앞쪽에 있는 전실 공간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본 중국 건물들과 같은 구조인 걸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옛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실 안으로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같이 온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전실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어! 거기 들어가면 안 될 텐데?’ 하면서 말리기도 했다.
동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금동관우좌상‘은 도금한 조각상이었다. 그 때문에 어두침침한 실내 공간에서도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동묘는 크지 않은 규모여서 둘러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땅에서 중국풍의 건물과 중국인들이 각별히 받들어 모시는 관우 장군의 사당을 보았다는 게 나름 인상깊게 머리에 남았다.
비둘기들이 정전 앞에서 한가롭게 노닐었다. 사람들이 준 먹이에 길들어서 그런지 도무지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겁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본체만체했다. 중국 도교에서는 관우를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이라 부른다. 비둘기들도 그걸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들이 관우 장군의 빽을 믿고 이렇게 겁이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