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로 봄꽃을 만나러 갔다. 꽃을 보겠다고 멀리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나 혼자서는 절대 나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리다. 300km나 떨어진 곳을 하루 만에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던 건 KTX와 제대로 일정을 짜서 세심하게 준비한 지인 덕분이다.
광명역에서 구례구역까지는 2시간 남짓, 많이 읽지도 못하겠다 싶었지만 기차를 탄다고 하니 왠지 책 한 권은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몇 년 전 선물 받았던 책인데 크로스백 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 아침에 얼른 가방에 챙겨 넣었다.
오직 선로 위만 달리는 기차, 번호가 붙은 좌석, 예정된 도착시간. 제한된 공간과 시간 속에 머무른다는 것에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별 거 하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 없는 휴식이었다.
화엄사 홍매화, 치즈랜드 수선화, 쌍산재 동백
오랜만에 '여유롭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다가 바뀌는 창밖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그 생각을 작은 공책에다 써 보기도 했다. 여행 중에 책을 읽으면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것 같다. 몇 줄 읽고 그 몇 줄로 한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책을 쓴 장석주 작가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는 걸 좋아했던 건 본능의 끌림이나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책에서 찾으려 했고 그러다 보니 책 읽기 자체가 즐거움이 되었단다.
요즘에 책을 읽지 않는 것, 읽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생길 때가 있다. 떠밀려서 책을 읽는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서 읽는 것도 아니고 숙제나 권유도 아닌 조금의 강제성도 없이 순수하게 책 읽기 자체가 너무 즐거웠던 때가 언제였을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엄마는 옷가게를 시작하셨다. 엄마의 빈자리를 책으로 대신할 생각이셨는지 몰라도 책을 많이 사주셨다. 게다가 출판사에 근무하시던 아빠 친구분 덕(?)에 ‘세계 7대 불가사의’ 같은 크고 무거운 책들과 백과사전도 있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TV 방송을 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 딱히 할 게 없으면 그냥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다 아는데 또 읽어도 또 재밌었다. 백과사전도 재미있었다. 과학 수업은 싫었지만 백과사전에 나오는 우주와 생태계는 너무 신비로웠다.
좋아하는 책은 닳도록 읽었지만 엄마가 아셨으면 깜짝 놀랄 만큼 읽지 않은 책들이 제법 있었다. 그 읽지 않은 책들의 거의 대부분은 위인전이었다.
낯선 이름의 위인들은 왜 그렇게나 많은지, 얼마나 훌륭한 일을 많이 했길래 글밥이 어마무시한 것인지 그땐 도무지 그 책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그림책이 아닌 위인전은 지금도 반갑지 않다)벽을 등지고 침대를 내려다보듯 서 있던 작은 키의 책장에 위인전이 쭈욱 꽂혀있었는데 한 다섯 권은 읽었으려나. 나로서는 위인들의 이름인 제목을 가끔 훑어보는 게 최선이었다.그때 그걸 다 읽었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여러 전집 중에서 국민서관의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은 인생책이다. 주황색과 연두색 표지가 지금 보면 너무나 촌스럽지만 60권인 이 전집을 제일 열심히 읽었다. 글은 깨알 같았고 간간이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는데 검정 펜의 드로잉이 다였지만 그게 또 그렇게 좋았다.
그중에서도 정말 좋아했던, 사랑했던 책들은 <소공녀> <작은 아씨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로빈슨 크루소> <십오 소년 표류기>였다.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세라가 되고 마치(March) 가의 딸들이 되고 하이디가 되고,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도 되고 소년들도 되었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lupenrir/30149198828 와... 검색하면 다 나온다.
나에게는 그들이 위인들보다 더 위인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밝은 천성과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하루 또 하루를 살아내어 외로운 분투를 끝내고 해피엔딩을 맞는 주인공들이 그 어떤 위인들보다 멋있고 대단해 보였다.
지금도 가끔 온기 하나 없는 세라의 다락방과 하이디의 오두막과 무인도의 동굴을 떠올린다. 읽을 때마다 설레던 그때가 그립다. 어리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던, 단단하지만 절대 거칠지 않았던 그들이 보고 싶다.
나는 가리지 않고 책을 읽지만 탐독하는 편은 아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읽는 것’도 좋고 '책'도 좋다.
감사하게도 엄마가 책을 많이 사주셨지만 읽는 것에 별 간섭을 하지 않으셔서 자유롭게 책을 읽었고 자발적인 독서로 이어져 '책 읽는 인간'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공간인 거실에 책을 쌓아놓고 산다. 먼지가 앉고 빛이 바래고 오래전 읽힌 후 이제는 책등의 제목만 읽힐 뿐이어도 그런 책들과 한 공간에서 마주 보고 있으면 참 좋다. 나의 희로애락을 쭉 지켜본 친구들이라 공간만 허락한다면 헤어지고 싶지 않다.
코로나 초창기에 20년 된 6단 책장과 중학교 때부터 간직했던 책들을 정리했다
구례에 도착할 때까지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덮었지만 목적 없는 책 읽기야말로 무상의 기쁨이라는 장석주작가의 말은 새겼다. 이래서 읽어야 하고 저래서 읽어야 하는 그런 책 읽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