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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Nov 18. 2023

끝과 시작

인생(2)





3주 동안 세무서를 쫓아다닌 작업을 엎었다. 굳이 누굴 탓하자면 내쪽은 아니었다. 일을 엎든 뒤집든 그 결정권을 쥔 손은  것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스럽게 일한 것도 아니지만 몸에서 진액이 숭숭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몇 발자국 걷다가도 엉덩이를 붙일만한 틈이 보이면 걸터앉고 싶었다. 손은 수고로이 각종 문서들을 작성했고, 세무 담당자와는 친구보다 자주 통화했다. 전화번호가 뜨면 반갑기까지 해서 친구 만들기 하는 걸로 착각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3주일이 지나고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상임이사가 홈페이지 만드는 데 돈이 많이 지불된다며 짜증을 냈다. 관공서가 갑질한다는 표현을 써가면서 자신의 성난 감정을 드러냈다.

"모든 단체들이 다 그 규정을 지키는 거지, 그걸 가지고 갑질한다고 말하면 안 되지요."

나는 설득하는 투로 말하지 않았다. 마치 기계 인간처럼 내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낮이가 없이 띄어쓰기처럼 정제된 말들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말이 되기 위한 기본 전제는 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임이사의 말과 나의 말은 공중전을 펼쳤지만 결국은 서로의 귀조차 듣게 하진 못했다. "아니, 우리 형편이 어려운데. 그런 걸 살피지도 않고 말이지... 갑질을 하면 되겠어요." 상임이사의 단골 멘트 '갑질'이 등장했다. 이젠 그 단어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그의 양분법 자체가 듣기 싫었다. 당신은 갑질하지 않는가. 당신은 늘 약자인가. 언제 처지가 뒤바뀔지 모르는 게 사람인데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드리는데도 자꾸 갑질한다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만하세요. 듣는 것도 힘드네요."

"이제 그만 퇴근하세요. 구치소 수감자들한테 전달할 물품 포장은 제가 할 테니까요."

시간이 걸려도 혼자서 포장하는 게 마음이 편할 테니 상임이사를 얼른 퇴근시키고 싶었다.

'다시 담당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올 텐데... 가부간 결정을 하고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서류는 제출했지만 일은 진행하지 않는 걸로 하자! 구차하게 사무실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깔끔하게 취소하겠다고 전달하자!)


지난 월요일에 상임이사의 얘길 통해 이번 작업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우물쭈물하지 말고 단호하게 결정된 내용을 세무서 담당직원에게 전하면 되는 거였. 다음 날.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 간단하게 취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행정적인 절차상 취소 서류 양식대로 타이핑을 하고 팩스 보냈다. 어떤 일이든 시작할 때는 생소하고 힘들지만 끝낼 때는 일사천리로 끝난다. 그 취소 서류 한 장을 팩스로 보내고 나니 맘이 한결 편해졌다. 취소 서류 처리를 하자마자 그동안 모든 노고와 간절함이 과거 매몰되었고, 정리된 과거는 계획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가슴을 누르던 무거운 맷돌 치워졌다. 일을 시작하기 전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무실엔 다시 평온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화장을 하기 전후가 다른 것처럼 내 맘에는 건너고 싶지 않은 골짜기가 생겼다. 벌어진 골과 골 사이를 인정하는 일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 운영과 관련해서 9월부터 끌어오던 소소하지만 애쓰던 마음이 소멸되었다. 내 마음이 미미한 크기였어도 그것이 사라지자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나는 뜬 채 지내면서도 봐야 할 핵심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너희가 본다고 하면 눈먼 사람이라고 하는 역설적인 말이 나를 지칭하는 것이었구나 싶다. 보았던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못 본 것처럼 내 잇속만 계산하면서 시간을 허비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 지불되지 않는 수업료 있던가.

 






이틀 전 목요일. 사무실에서였다. 상임이사가 세무서 일을 물어왔다.


"세무서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취소했습니다."

"......."

(상임이사가 무슨 말을 지만 이젠 나와 상관없는 내용이다. 나는 12월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내 물건들을 뺄 거다.)


"지난번 식사비 지출하시고 잔액 남은 건 어디두셨어요?"

"아, 그때 다른 사람이 밥값을 지불해서  돈은 그대로 여기 있다."


"점심때부터 비가 내린다는데. 얼른 퇴근하세요. 우산은 챙겨 오셨어요?"

"알았다. 좀 있다 들어갈거구만."

(하늘에 구름이 뿌옇게 변해가지만 비는 많이 내릴 것 같지 않다.)



복수를 결심한 사람의 마음은 죽음과 가까워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상임이사의 일처리에 대한 옹졸한 태도에 분개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나간 안개처럼 가뿐하게 사라졌다. 미움도 쓸데없고 안쓰러워할 필요도 없는 분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색다른 기분이 든다. 낯설기도 하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기분이 참 다르다. 제삼자 입장이 된 것 같다. 저분이 하는 말이 나와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나니 감정이 널뛰지 않는군. 올해까지 이곳 일을 끝내기로 결정한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정해놓은 다음 행보에 따라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것부터가 첫걸음이겠다. 지겹게 오랜 세월을 여기서 보냈네. 칠 년 이라니. 하루라도 젊을 때 이곳 사무실과 정리하는 게 옳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는 말을 떠올려본다. 납득되는 진리의 말에는 머릴 끄덕였으면서도 정작 내가 부어야 할 새로운 포도주를 부을 곳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그 포도주를 계속해서 품고 있다가는 산패될 것이 뻔한데도 다음 행동을 옮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다. 떠날 때가 되어서도 머물러 있었던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도 지금의 내 마음이 얼마나 고요하고 차분한지 감사한 일이다. 로 그 인생의 타이밍과 마주해 있는 것 같다.






[나니아 연대기 2권. 사자와 마녀와 옷장]


회원 한 명이 제주도 여행으로 독서 모임 일정이 하루 미뤄졌다.

보통 목요일 오후에 모임을 갖는데, 이번 주에는 금요일 오후로 일정이 변경되었다.

9월부터 한 명의 작가를 깊이 파는 독서를 진행 중인데, 그 첫 작가는 C.S. 루이스다.

[오리지널 에필로그], [신자의 자리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나니아 연대기 1, 2권]까지 독서를 마쳤다.


이번 금요일 나눔을 했던 책은 [나니아 연대기 2권 -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다.

나니아 연대기는 개인적으로 세 번 이상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매번 다른 포인트가 눈에 들어왔고 해석도 조금씩 변했다. 매년 읽은 게 아니기 때문에 텀을 두고 읽는 동안 나이에 따라 책 내용이 다르게 다가왔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네 명 가운데 에드먼드가 하얀 마녀로부터 받아먹었던 터기 젤리. 캐어 페러벨 성에 석상이 된 동물들을 보면서 적용했던 내용은, 마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 그리고 역시 마녀의 마법 때문에 석상이 된 동물들의 처지를 보면서, 과거에 열정과 순수를 잊고서 석상처럼 마음이 굳은 채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 하나.

<나니아 연대기> 2권은 네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가 줄거리인데,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하는 피터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 제왕이 되는 것 역시 타고난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니아로 들어간 네 명의 아이들에게 닥친 나니아의 현실 앞에서 당당히 맞서 나가는 동안 변화에 대응하고 자신들 역시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통해 작가 c.s. 루이스가 보여준 성장의 서사가 지금의 나한테 시기적절하다고 느껴진다.

최근 나는 다가올 변화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아직은 생각이 많다. 하루를 다 보내고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생각 때문에 자정을 넘어서 잠든다. 쏟아지는 잠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든 날에도 생각들이 날 반듯하게 앉히는 걸 느낄 때도 있다. 어쩜 그렇게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는지. 나를 깨워서 쉼이 없는 무한의 세계로 끌고 간다고 한들 그건 내가 구하고 있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꾀를 부리고 머릴 굴리는 요령들이 아니겠는가. 대가 지불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으로 올해 남은 시간을 준비할 수 있어야지. 그래야 힘들어도 참아낼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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