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돼지고기 굽는 냄새는 머리카락을 불에 태울 때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며 방문 틈새로 들어온다. 꾸다 만 꿈을 끊고 아침을 맞을 때마다 집 구조를 바꿀 궁리하게 되는 나는 짜증이 좀 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아침 200그램 정도 분량의 돼지고기를 굽는 냄새를 맡으면서 잠을 깨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나 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제주도에 계신 삼촌에게 흑돼지고기를 주문한 아버지는 당신이 먹어치운 돼지고기에 대해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대단한 식성을 자랑하는 듯한 내용의 통화를 하셨단다. 나는 속으로 '제발 돼지고기는 적당히 드시라고요.'라며 소리 없이 저항한다.
찐득한 밀도감에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고기 냄새로 점차 방 안이 자욱해질 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 방 베란다 문을 열어젖힌다. 어떤 날은 익사 직전에 느끼는 답답한 숨 막힘이 이런 느낌일 거라고 고기 냄새와 익사를 등치 시키기도 한다. 이성과 감정이 교차하는 어느 지점에서 제일 먼저 결정하는 건 '환기'이다. 새벽 4시 반에 바깥공기는 대게 쨍하게 차갑든지 써늘하든지. 그 차가움을 절실히 환영하면서 문을 열자마자 혼이 빠져나가듯 물체가 된 냄새 덩어리가 밖으로 나가는걸 코로 인지할 수 있다. 몇 분 동안 문을 열어놓으면 내 방구석까지 찬공기와 축 쳐진 냄새 간의 대류 현상이 일어난다. 덮고 자던 이불에서 냉기가 느껴지고, 이불 바깥으로 드러난 팔다리가 거무튀튀하게 피부가 변색되는 시점까지. 버틸 수 있는 한도까지 찬기를 견디다가 도무지 더 잘 수 없다고 포기하면서 나는 그날의 첫 화장실 볼 일을 보려고 일어난다. 내 잠을 깨우는 것이 냉기인지, 냄새인지, 소변인지 분간은 안 가지만 이젠 이렇게 일어나는 일과가 하루 루틴이 되었다. 단백질의 침입이랄 수 있다.
지난달에 내가 돼지고기를 먹은 횟수는 두 번이 안 된다. 아버지가 가끔 고기 중량을 초과해서 굽고 남으면 얕은 접시에 몇 조각 고기를 담아두기도 하신다. 그렇게 은박지로 남은 고기 몇 조각을 싸두는 게 내가 먹기를 바라시는 것 같지만 남은 자투리 고기라고 해서 내가 먹는 건 아니다. 접시에 담긴 그 고기는 내가 부엌 정리하면서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 음식일 뿐이다.
우리 집 냉장고 냉동실 서랍 칸에는 돼지고기 덩어리들이 그득하게 들어있다. 그것들이 한 덩어리씩 사라질 때마다 불러오는 아버지의 복부 사이즈가 확대되어 눈에 들어오고 걱정이 찾아온다. 그렇지만 걱정만 할 뿐 아버지에게 고기의 양을 줄이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확신하는 동물성 단백질 섭취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가 어느 사이 신앙처럼 아버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지 않으면서 전문가의 말은 신뢰하는 인간 논리에 대해 나는 이미 두 손을 든 거다. 그래서 식사 때마다 드리는 혼자만의 기도는 정말 나만 외치고 내 귀에만 돌아오는 메아리가 되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되는 날이 있다.
똥돼지를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모들과 삼촌, 동네 친척들이 가까운 이웃 동네에서 살 때는 검은색 흑돼지가 푸세식 화장실 밑에 있다는 사실이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묵은똥을 먹지 않고 신선한 똥을 먹는다고 해서 돼지를 깨끗한 짐승이라고 부르는 건 일종의 괴변이다. 돼지는 자기가 배설한 분뇨 위에 몸을 뒹굴고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자는데 어찌 깨끗한 짐승이라고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짐승의 청결 여부를 떠나서 한 동네에 돼지를 키우는 집이 있다는 사실은 고기를 나눠 먹을 기회가 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귀한 돼지를 어떻게 함부로 도축할 수 있었겠나. 돼지 키우는 집이라고 돼지고기를 자주 요리해서 먹을 형편은 아니었다. 잔칫날, 상을 당한 날 가까운 이웃 간에 '삼촌'이라는 호칭으로 엮여 지냈던 마을에 일이 생기면 돼지고기국(몸국)과 편육이 푸짐하게 한 상 차려졌다. 아주 먼 옛날 일이다.
아버지가 삼촌에게 돼지고기를 주문할 때마다 배달되는 고기는 흑돼지가 아닌데도 '흑돼지'라고 한다. 하얀 피부에 검은 털이 있어도 흑돼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도축업자들의 썰을 들었는데... 그렇구나. 제주도에서 육지로 건너오면 다 흑돼지라고 부르지 뭣하러 피부가 어떻고, 털 색깔이 어떻고 하며 따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향토 음식 재료의 기원에나 등장할 돼지에 관한 이야기가 새삼 내 기억의 강가에 드리운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줄을 따라 올라오는 주말이다. 일주일 전에 아버지가 자필로 쓰신 A4 스무 장 분량의 에세이를 건네받아 첨삭하며 타이핑을 쳐서 드렸다. 제주에 있는 아버지의 지인분이 의뢰해서 쓰신 아버지의 기억의 파편이라고 이름 붙인 글이다. 아버지의 글에는 등장하지 않는 돼지가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제주 하면 동시에 떠오르던 가축이다. 글 속에서도 아버지와 내가 다른 세월을 살았던 흔적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