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너무공주> 책에 자음 '이응'이 땅콩이라고 착시했던 건 땅콩의 나라 '감비아'가 먼저 떠올라서였다. 이번 주 함께 경주 나들이에 동행한 선생님은 그림책을 읽으면서 '웃프다'라고 했다. 선생님이 읽기 바로 몇 분 전, 나는 제목도 '너무너무? 너무하다' 싶었고, 땅콩 같은 그림은 또 뭐냐? 싶어서 책장에서 빼들었다가 선생님이 앉아있던 테이블에 내려놨다.
땅콩이라 착시했던 '이응'은 바로 임금님의 얼굴이며, 첫 자음 '니은' 기둥 옆에 양머리로틀어올리고 살짝 반 얼굴을 보이는소녀가 이책의 주인공 '너무너무공주'다. 함께 갔던 선생님은 이 그림책을 웃픈 이야기라고 했고, 나는 웃픈 이야기에 허허 허탈을 추가했다. 만일 어린이가 이 그림책을 읽게 되면, 카세트테이프에서 무한반복 듣기를 하는 동안 늘어난 폴리에스테르 필름 같을까? '임금님의 말이 느리게 칙칙 돌아가는 소리로 들릴지도... 귓가를 떠나지 않고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이야기 책이 될지도...'
지난주 월요일은 내가 경주 나들이 가기에 적당한 날이었다. 순전히 내 기분에 최적화된 하루라고 생각해서 점심을 먹고 시외버스를 탔다. 그날 경주 낮기온이 섭씨 31도 전후였으니 뚜벅이가 돌아다니기엔 다소 더웠지만 흐린 구름이 하늘을 가린 덕에 두세 시간을 너끈히 돌아다녔다.
내 인생에 소지품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데, 땀을 닦던 손수건이 손에서 사라진 걸 뒤늦게 알아챘다. 손수건은 나한테 '뒤늦은 후회' 같은 주제를 던져준 아이템이 되었다. 내 손에 들어있을 때는 내 맘대로 왼쪽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가, 땀 한번 닦고 나서 오른쪽 주머니로 옮길 수 있는 그냥 물건, 뒷목에 흐르는 땀 때문에 스카프처럼 목에 두를 수 있는 그런 물건인 손수건. 내가 어느 사물을 맘껏 주무르고 구겼다가 네모나게 접을 '손안에 자유'를 한 번쯤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뒤늦은 후회와 아쉬움'을 느낀 뒤에야 비로소 '작은 자유'가 내게 있었음을.
아쉬운 마음에 조금 전 걸어왔던 황리단길 입구까지 왔던 길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며 길바닥에 떨어진 휴지 줍듯 '손안에 자유(였던)' 그것을 줍기라도 했으면 하는 희망사항을 갖기도 했지만 끝내 텅 빈 손만 남았다. '아뿔싸! 그것을 참 좋아했는데 손수건 무늬랑 색깔들을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네.' (보면 알겠는데. 내 머릿속 기억 공간에는 없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그 손수건을 받는 순간 기분이 밝아졌다는 게 남아 있는 기억의 한 조각이다.
'백팩에 여분의 손수건 한 장을 더 챙겨 넣고 올걸. 이 정도 더위에 손수건 없이 걸어 다닐 순 없으니... 어디 적당한 가게에 들어가서 맘에 드는 손수건을 한 장 사야겠다.'
'손을 떠난 물건. 사건'에 대해서는 애착을 버리고 가급적 담담하게 나는 손수건 두 장을 샀다. 오늘만 쓸 일회용으로 아닌 앞으로 계속 쓸 생각에 넉넉히 두 장을 구입했다. 그런데, 나흘 뒤에 그것들 가운데 한 장을 또 잃어버렸다. 무척 더웠고 땀을 많이 흘렸던 날에 사라졌다는 것이 '손을 떠난 두 장의 손수건'의 공통점이 되었다.
경주 포석로에 있는 '소밀소밀' 그림책 카페
'나를 위한 원목 책상을 하나 사고 싶다.' 숲 속 오두막집이 그림책 카페이기나 하듯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것에 애정이 느껴졌다. '나도 이런 책방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림책은 많이 못 읽었어도, 세상에 나온 책들 역시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나도 책방을 운영하고 싶네..
걱정해도 해결할 힘이 부치면 힘을 내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원래부터 나는 힘을 갖지 못한사람일수도있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절절하게 체감하고 있다.
2월 퇴사 이후, 4월에 요리학원 등록과 필기시험, 5월에 한국사능력시험 심화과정 통과(겨우), 6월엔 발길 닿는 데로 가고 싶은 지역을 가보고 있다. 7월에는 여름성경학교 봉사하다보면 금방 시간이 갈테고, 8월에는 지금의 작은 서가를 다른 곳으로 이사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집에도 몇몇 변화들이 들어올 것 같아서 있는 힘을 청소하는데 소진하고 있다.
집 화장실 손잡이 쪽에 4,5년 전쯤 망치로 내리찍어서 움푹 패인 흉터가 어제는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망치 자국에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는 문짝 귀퉁이를 손톱으로 긁다가 칼을 갖고 와서 더 넓게 긁다 보니 앞면과 뒷면 모두를 엉망으로 긁어버렸다. 페인트를 칠한 듯 안 칠한 듯 일부러 무늬를 창작한 것처럼 꾸밀 궁리를 했지만, 내가 한 짓을 내가 알기에 페인트칠을 해야만 가려질 게 뻔했다.
손에 경련이 날 것 같아서 문짝 긁던 일은 잠깐 중지하고 마트로 달려가 젯소, 페인트, 솔붓을 사 왔다. '페인트칠을 위해 물건을 준비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어디 이것뿐일까. 이번 주 토요일에 책모임을 준비하고, 7월부터 초등학생 독서코칭 커리큘럼을 정리해야 해.'
작품이라 우기면 작품으로 남을수도 있고, 흉물스럽다고 한마디라도 토를 달면 얼른 페인트칠로 감쪽 같이 변신시켜야 할 화장실 문을 그대로 두고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윽고 저녁이 오고 나의 일과는 다시 집으로 이어졌으니...
저녁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면서 문짝에 젯소만 칠할지, 젯소랑 페인트를 칠할지 결정 못한채 손이 가는데로 젯소부터 칠했다. 그렇게 딱 젯소만 칠하고 하루를 정리했다.오늘처럼 또 내일이 오겠지. 한밤중에 젯소가 마르고 열지 않은 페인트를 열지말지는 나도 모르는 내일이 오면 결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