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차에 대한 고민 없이 피사체의 실루엣을 화면에 담는 순간의 짜릿함을 회상한다. 멀어지는 황금빛 노을을 배경 삼아서 눈 앞에서 거인의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피사체의 실루엣이 마치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그렇게 내일보다 젊은 오늘의 노을이 저만치 멀어져갔다.
- 07월28일 저녁. 삶에 소품 하나: 노을이었다-
분재형 머루나무 한 그루 (in 다원)
실내 인테리어용 머루나무 한 그루를 들고 카페 문 안으로 들어오는 젊은 사장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은 쇼핑을 했다는뜻을품은 목소리였다. 가게 주인이 점원에게쇼핑한 리스트를 읊는 노이즈쯤은 자연 음소거를 할 정도로내시선은 포도송이가 조랑조랑 달린 화분에 가 있었다. 그리고 일 주일 뒤에 그 열매가 머루라는 사실을 듣고나니 다시 화분에 정신을 뺏겼다. 과연 깔끔하고 시원스러우면서 귀엽게 달린 송이들이다.
이 공간 구석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분들은 대게 무심한듯 놨다고 봐왔다. 예를 들면 행운목이 대표적인 무관심종 가운데 하나일거라고 추측했다. 그도 그럴것이 행문목 옆 원형 테이블에 앉을 때마다 화분 위에 마사토는 바짝 말라있고, 성의없이 사방팔방으로 팔을 휘젓듯 길게 뻗은 무성한 이파리에는 조경 가위로 잘려나간 흔적이 안 보인다.
그래서인지 행운목의 잎들은 길게 상하좌우로몇센치씩 차이로고르지 않게 자라고 있다. 화분 흙 위에는 언제쯤 꽂았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 식물 수액의 빈 앰플이 거꾸로 꽂힌채 세월의 흔적을 쌓고 있다. 행운목에는 완전히 말라빠진 잎은 겨우 두 줄기 뿐이고, 오늘 다시 잎을 살펴보자니 자연적인 반질거리는 잎 광택 때문인지 먼지는 보이진 않는다. 혹시 내가 이곳 행운목에서 티끌이라도 찾아내어 주인의 무심함을 소문내고 싶어서 심사가 꼬인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머루나무 화분을 사들고 카페에 들어서면서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그 화분의 이력을 설명하던 주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본다. 알아야 할 것은 이 카페의 주인은 그녀라는 사실이다. 나는 가끔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이라는 사실이다.
행운목과 엽서와 창 24.08.04 (in 다원)
나의 애착 자리가 된 뒷마당이 보이는 창가 원형 테이블 옆에 있는 5,60센티미터 높이의 둥근 화분에 심긴 5,60센티미터 이상 길이의 행운목이 있다. 그것을 돌본다고 내색하지 않고도 행운목과 함께 이 공간에 군데군데 가져다 놓은 화분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을 위로하기도 하는 것 같다.
- 8월4일 오후. 생각하게 되는 소품 하나: 행운목이다-
나도 온갖 엽서로 책장에, 방 벽지 앞에, 냉장고 문짝에, 스위치 케이스 위에 요래조래 붙여봤고 앞으로도 그 어느 위치에 엽서를 붙일거다. 엽서 붙이기 작업은 '그냥 손이 움직이는데로 할 수 없는' 공감각적 센스를 끌어올려야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런 난이도가 좀 있어야 하는 엽서 붙이는 작업과정은 우선, 엽서들을 빈 벽에 붙이고 몇 걸음 뒤로 가서 바라보면 이쁘지 않아서 다시 벽 앞으로 되돌아가서 엽서를 떼어다가 오른쪽에 있던 것을 왼쪽에, 중간 것을 조금 위로, 위에 있던 것을 몇 센티미터 옆으로 밀어내며 붙여본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미적 감각이라서 엽서로 완성한 인테리어는 자주 자리가 바뀐다. 언제 변할지 모를 공감각적 재능은 들쑥날쑥해서 제멋대로 내멋대로 꾸미고 산다.
나는 이 카페 벽에 붙여진 엽서 위치가 굉장히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카페를 꾸미려고 결정했던 처음부터 저곳에 있어야 했던 소품 같다.
이곳 카페에는 있는듯 없는듯 하게 엽서들이 곳곳마다 있다. 테이블이 있는 곳마다 두 장에서 네 장까지 겹치는 그림이 없이 이 공간과 한 몸이 되어 있다. 화장실 거울 옆에도 두 장의 흑백사진 엽서 중 한 장에는 비키니를 입고 강변을 바라보는 세 여인이 있고, 다른 한 장은 청남방 데님 셔츠 상의에 꽃무늬 스커트를 입고 라탄 바구니를 든 여인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 엽서이다. (아마도 남자 화장실엔 거기에 어울리는 엽서를 붙여놨을거다.)
위 사진 속 네 장의 엽서들 가운데 복숭아를 잘라놓은 사진이 있는데, 얼마 전 엄마가 과일가게에서 얻어 온 복숭아가 떠올랐다. 공짜로 그냥 받아온 그 복숭아는 공짜에 걸맞게 맛도 공짜에 가까웠다.
무(없을 무) 맛에 가까운 과일을 건강식이라고 우기며 먹다가 더 먹으면 힘들거라고 판단하고 나머지 복숭아로 통조림으로 끓여냈다. 누르스름한 원당에 분홍색이 감도는 복숭아 과육을 슬라이스하고, 냄비에 복숭아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복숭아가 익을 때까지 끓이고 가스불을 끄면 끝이다. 분홍색이 우러나온 복숭아를 유리병에 담고 열기를 식히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니 엄마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그 무맛의 복숭아가 엄마의 입맛과 기분을 끌어올리는 맛난 과일로 변신한 것 같다. 단맛을 선호하지 않게 된 내가 부모님께 원당의 단맛을 먹도록 유도하는 간식을 조리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린다. '그 무맛만 아니었다면 복숭아가 통조림이 되진 않았을텐데'라며 씁쓸해 하면서도 어쩔수 없어했던 무력감이 약간 녹아있는 간식이다.
-7월27일 단맛을 좋아하지 않지만 부득불 단맛을 첨가해야 했던 소품 하나: 복숭아통조림 이다-
소품들이야 얼마든지 있지. 저녁 노을처럼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 있고, 단골 카페 실내를 장식한 집기들과 소품들이 있고, 한 여름 달고 물이 많은 복숭아 때문에 내 맛도 니 맛도 없다는 평판에 치이는 무맛나는 그런 복숭아도 있지. 그 소품들은 내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다음 날이 되면 기억해도 떠오르지 않는 없었던 현상 같기도 해. 하지만 그런 자잘한 소품들이 있어서 그나마 나의 일상이 뻑뻑하게라도 돌아가고 있다고 봐.
오후 3시쯤 카페에 들어와서 저녁 7시가 넘어가는 이 시각까지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가 겁이 난다. 왜냐면 어제 우리집 에어컨 실외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에어컨에서는 선풍기 바람보다 못한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나온다. 최근의 더위를 이길 자신이 없는 나는 집 근처 전자상가로 달려가서 새 에어컨을 구입했다. 구입한다고 끝난게 아니다. 에어컨을 설치하기까지 최소 5일에서 일주일이 소요된다는 직원의 말에도 에어컨을 사야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빨리 지금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래서다. 내가 늦은 시간까지 이 카페에서 하릴없이 있어도 있어야 하는 이유 말이다. 그래도 카페 문 닫기 전에는 자리를 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