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청로 로데 Sep 21. 2024

내일을 살고 싶다는 욕심

소소한 하나

"늦었다고 인식하는 순간에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혼자 버둥거려 보겠지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어. 혼자서 안 되겠다 싶으면 무조건 연락이 닿는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긴급구조 요청을 해야 된다고. 구조 때를 놓치면 아주아주 힘들어질 거라고...  명심해야 할 거야.

혹시 지금 내 충고를 깜빡했다면 해답을 찾느라고 꽤 곤욕을 치러야 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Wo: "방금 네가 한 말에 일정 정도 공감하지만 인생에서 얻은 답을 몸에 새기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시작해야지 어쩔 도리가 없어. 몸에 새긴다는 게 문자적으로 글자를 문신으로 새긴다는 뜻이 아닌 건 알잖아. 몸에 배도록 경청하고 애쓰라는 말인데. 사실상 듣는 것 만으로 습관이 되진 않잖아. 그래서 우선적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지. 들린다고 다 듣는 게 아니잖아. "


"나도 알지. 알고 말고. 하지만 너도 내 처지가 되면 다르게 행동할 거라 장담하지 못할 텐데. 안 그래?!"


Wo: "그럴 수 있지. 어떤 행동을 취하건 빠른 법은 없더라고. 너도 겪었을지 모르겠다만. 아버지가 들떠서 확언했던 말을 조류 깃털 뽑듯 무시했던 거 말이야."


"그랬던 적이 있지. 그때 내가 정서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입어서. 자식이지만 아버지가 징글징글했어.

그래서 겨우 벗어나겠다고 발버둥 친 게 아직 새벽 다섯 시가 안 됐을 시간에 집 밖을 나왔던 거지. 불도 안 켜고 어스름한 어둠을 더듬으며 손가방에 안경, 볼펜, 텀블러, 지갑, 손수건을 챙겨서 거실문을 열고 나왔어.

시간, 아버지는 샤워를 막 끝내고 (알다시피 아버지는 새벽 서너 시쯤 샤워를 하시잖아) 팬티바람에 스트레칭을 하고 계셨어. 하체 근육이 없고 말라빠진 다리는 나보다 날씬해 보였어. 아버지 연세도 꽤 드셨으니 근육량이 계속 줄어드는 게 눈에 띄게 보이는 거지."


Wo: "새벽에 집 나가서 어딜 간 거니?"


"교횔 갔지. 지난밤 잠을 설쳤더니 걸음이 휘청거리고 귀도 먹먹해서 소리가 잘 안들리더라고.

시장 앞 건널목을 지나 곧장 이어진 윗길로 가다가 왼쪽으로 커브를 틀어 직진하면 교회에 도착하지. 교회 화단엔 민들레 홀씨 모형 전등불이 반짝거리고, 주차장에는 차량 다섯 대 정도 주차되어 있더라고. 입추가 지난 지 언젠데 새벽 공기는 여전히 열대야이고. 새벽이라도 상쾌한 맛이 없어"


Wo: "새벽기도는 잘 드렸어? 그런 다음엔 뭐 했는데?"


"기도 시작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졸음이 쏟아져서 왼쪽으로 목이 꺾일 정도로 졸다가 엎드렸어. 포갠 손 위에 졸음으로 더 무거워진 머릴 얹었더니 금세 손이 저려오더라고. 고갤 들어 눈을 떠보니 다섯 명 정도 조용히 기도드리는 모습이 보이더라.

다시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도를 했지. 저수지에 빠진 익사자처럼 도와달라고 했는데..  무슨 대답을 하는지 잘 못 듣겠더구먼.

교회 안이 고요해지자 난 가방을 배게 삼고 긴 의자에 모로 누워서 잠을 청했어. 지난밤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두어 시간을 푹 잤지 뭐야. 여덟 시 알람이 울리자마자 끄고 다시 잤어.

그렇게 잠들었다가 얼핏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홉 시 이십 분이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내가 다니는 치과에서 진료받으러 오라는 문자가 날아왔어. 6개월 전에도 같은 내용의 문자가 왔는데 이번에는 검진을 받아봐야겠다는 맘이 들어서 전화를 했지. 오늘 오전에 대기 손님이 많지 않으니까 점심 이전에 오면 좋겠다기에 그러겠다고 대답했어. 어젯밤 잠을 설친 이유를 말하자면 길어지지만 아버지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따라 마구 내뱉는 말을 더는 듣고 있을 힘이 없어서야. 나도 최근에 계속 이곳저곳 병치레로 아파서 이틀 건너 병원엘 가고 있잖아."


Wo: "힘들겠구나. 한 달 가까이 코로나를 시작해서 목감기에 중이염, 그 이후 안과도 갔고, 지금은 귀가 먹먹해서 소리도 잘 안 들린다 그랬지. 증세는 어때? 호전되는 거 같아?"


"병원을 옮겼어. 인근에 잘 본다는 곳으로. 소리가 먹먹하게 들리니까 답답해서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나 겁이 나네. 추석 연휴 마치자마자 일찍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는데. 나보다 먼저 온 환자들이 이미 열 명은 되더라고. 그래도 기다렸다가 의사 진료를 받았지.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고 나서도 청력은 여전한데 괜찮아진다고 혼자서 토닥거리고 있다."


Wo: "추석 전야! 뭐 그런 긴장감이 있진 않았니? 아니면, 예상외로 가족들 회의가 잘 풀렸던 거니?"


"금세 연휴가 끝났네. 그지~ 지난 8월 한 달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보고 뒤집어본 게 '부모님의 귀향 문제'잖아. 처음 일이 주간은 나도 부정적이었지. 두 분이 고향으로 들어가는 거랑 내 생활이 맞물려 있어서 신박한 해결책이 안 떠오르더라. 또 몇 주일을 보내면서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지금은 많은 걸 내려놨지.

아마도 여기서 벌여놓은 개인적인 일을 다 접어야 할 것 같아. 부모님과 같이 들어가기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Wo: "답답하지 않을까? 섬이잖아. 잠깐 동안 살면 낭만일지 모르지만, 거기서 계속 죽을 때까지 살라고 하면 감옥 같을 수 있거든. 들어가기로 생각했다니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래?"


"길게 보면 오 년에서 십 년 정도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할 수 있지. 결국엔 나 혼자 남을 거고. 혼자 남게 될 때 거기엔 동년배 친구가 없으니 말뿐인 고향이지. 그때가 되면 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라고. 지금은 들어가지만 영영 가진 않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추석이 끝나고 이틀은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는 듯이 보였어. 아버지 말이야. 걸으니까 발이 훨씬 개운하다고도 하셨지. 사흘 되는 날부터 또 맘이 급해져서 히스테리를 부리시는 거야. 가겠다고 했다가 안 가겠다고 했다가. 옆에 사람을 들들 볶아대니 너무 지쳐서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서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녔어. 얼굴 안 보니까 살 것 같더라고. 이젠 계획이니 뭐니 하는 단어조차 듣기 싫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왜 자꾸 같은 말을 하는 건지..."


Wo: "아버지가 불안하신 거겠지. 말이라도 해야 덜 불안하니 자꾸 이말 저말 내뱉는 거 아니겠어. 안타까운 사실은 마음이 내일에 가 있으니까 오늘을 즐겁게 누리지 못하고 계시고. 설령 시골집을 리모델링하고 이사를 한 다음이 없잖아.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 일 것 같은 시골살이는 없거든. 고령의 나이에 고향에서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긴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실지 상상이 되는 거지.

마을 동네 사람들이 반긴다고 하지만 한 두 달 지나면 들뜬 기분도 시들해질 거고."


"그렇게 예상되지만 그러기에 집 리모델링 하는 동안 몇 개월을 심심하게 살아보는 게 아주 의미가 없는 건 아닐 것 같아. 요즘 5도 2촌으로 도시와 시골집을 오가면서 생활하는 것도 괜찮을 텐데. 굳이 지금 아파트를 정리하고 다시 돌아올 다리를 불사르고 떠나겠다는 건 아주 멍청한 결정 같거든. 그런데 팔순 넘은 노인의 결정이 무모해 보여도 당신이 겪어야 할 고통이 있다면 그것도 당신 몫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걱정되네. 시골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시잖아. 다만, 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죽을 것 같다는 말에 걱정돼서 따라가기로 하신 거거든. 어찌 보면 거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우리가 예상 못한 즐거움이 있을 수 있겠지."


Wo: "현재를 살지 못하고 아직 지어지지 않은 미래만 보고 불나방처럼 덤비는 아버지의 그 마음이 '욕심'처럼 보여. 욕심을 자기 고집이라면 그분 고집에 무방비로 맘고생하는 다른 가족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 같아. 한 가정 안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될 분란과 걱정거리를 흙먼지처럼 마구 일으키는 아버지 본인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오늘을 살아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상황을 겪으면서 교훈을 받게 되네. 과정을 밟아야지. 한 걸음씩 걸어도 도착하지 못할 수 있잖아."


"나는 아버지가 뿌리는 감정에 노예처럼 끌려다니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어. A부터 Z까지 허다한 일 가운데 아버지의 감정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거든. 그 감정대로 말을 뱉을 때 통제하지 않으면 감정 그물이 얼마나 무한대로 주위 사람을 괴롭히고 들볶는지. 그 감정을 축소해서 보기 위해서라도 먼발치에 떨어져야 한다고 봐. 휘둘리지 않으려면 멀찌감치 거리를 둬야 해. 나도 나의 일을 하며 살아야 하거든."


Wo: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속은 좀 편안해졌어? 여전히 답답하니?"


"훨씬 편안해졌어. 순간순간 아버지가 던진 감정의 그물에 낚인 멸치처럼 몸이 터지든지 비늘이 벗겨지기도 하지만. 이제 알았잖아.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삶을 그분은 그분의 삶을 살아야지. 뒤섞이는 순간 공멸이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적극적으로 돕겠지만 휘둘리는 건 용납하기 싫어.

속이 까맣게 탄다는 말처럼 마음이 완전히 소실될 정도로 내버려 두진 말자."




작가의 이전글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