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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씨 Apr 20. 2021

나는 당신에게 만년설로 쌓이려 해

스포 있는 '이터널 선샤인' 리뷰

 처음 만난 남녀가 있다. 몇 번의 눈맞춤으로 시작된 남녀의 대화는 길어진다. 자연스럽게, 빠르게, 오래 알던 사이인 것처럼.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잔잔한 가운데 갑자기 튀어 오르며 QnA는 끝이 없다. 낯선 사람에서 연인이 되는 과정. 작은 열차 칸 안에서 시작된 사랑은 이제 얼음 바닥에 누워 별을 바라봐도 좋을 정도로 따뜻하다.


평화로워 보이던 연애의 어느 날, 남자는 이질감을 느낀다. 이질감은 점점 커져 환상이 되고 환청이 된다. 남자와 싸우고 짐을 챙겨 현관을 나가던 여자가 갑자기 부엌에서 나타난다.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온다. 현실의 남자는 어제 기억 삭제를 의뢰했고 독특한 헬멧을 쓴 채 누워있다. 직원들은 맡은 의뢰를 성실히 수행 중이다. 평화로워 보이던 어느 날은 과거의 하루. 기억을 지우려던 남자는 이제 지우고 싶던 기억 속을 여행해야 한다.


행복했던 시작부터, 서로를 지워버릴 정도로 미워하던 마지막까지. 연인의 주마등이 시작된다. 재배열되고, 무너지고, 뒤섞이고. 걸어온 발자국이 지워지는 여행길에 남녀가 있고 관객인 우리가 있다. 연인과, 기억과, 기억을 지우는 회사원들과, 끝내는 자기 자신과. 남자는 끝없는 대화를 하고 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기억이지만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다. 여행의 끝자락. 남자의 기억일지 여자의 기억일지 모를 누군가가 말한다.



“날 기억해줘. 최선을 다해줘. 그럼 가능할지도 몰라.”



여행은 끝나고, 직원들은 고객의 요청을 완벽하게 해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남자가 헤매던 언제 끝날 지 모를 시간들은 하룻밤의 꿈으로 사라졌다. 잠에서 깬 남자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기차를 탄다. 그렇게 남녀가 두 번째로 처음 만난다.




한 장의 종이, 그 위에 써진 한 줄.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잦아지던 다툼과 통하지 않는 대화에서, 클레멘타인은 망각으로 도망쳤다. 분노에 휩싸여 조엘도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러 간다.


운명의 상대라도 만난 것처럼 끌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두 번째 첫 만남에 이은, 두 번째 두 번째의 만남. 남자가 여자를 데리러 온다. 차에 탄 여자가 조수석 서랍에서 찾은 것은 남자를 지우러 간 날의 상담 녹음. 자신을 놀리냐며 화를 낸 남자의 집에도 같은 우편이 와있다. 헤어짐에 더해 기억까지 지우려던 당시의 격렬하던 감정이 날 것 그대로 녹음기에 담겨 있었다. 모르는 게 많아 알아가던 남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다 안다'는 생각에 모르던 때로 떠났던 연인이다.



  -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안 보여요.


- 보일 거예요. 곧 거슬리게 될 테고 난 지루하고 답답하겠죠. 나랑 있으면 그렇게 돼요.


- …괜찮아요.


- …좋아요. ”



영화 "이터널 선샤인" 中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만큼, 기대감이 컸다. 솔직히 처음엔 좀 지루했다. 사랑 이야기인 건 알았는데, 이 정도로 잔잔하고 평화롭고 조용하게 끝나는 걸까.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좋았다. 완전히 예상 밖으로 흘러갔고 그 예상 밖이 너무 좋아서. 스포일러를 당하고 봤다면 엄청 후회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서 좋았던 점은 사실 스토리보다는 연출에 있었다. 이렇게 CG가 많이 쓰이는, SF 스러운 스토리로 진행될 거라는 예상도 못했기 때문에. 사라져 가는 기억과 그 안을 헤매는 남자. 멜로 영화라는 틀을 이탈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속도감 있고, 혼란스럽고, 어떻게 보면 기괴하다 싶은 장면도 있다. 관객의 당황함까지 노렸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져 가는 나의 기억 속이라니. 아무도 겪어보지 못했을 일이니까. 덕분에 관객도 남자가 겪는 감정의 파도를 그대로 맞는다.



인생 2 회차라는 표현처럼, 남자는 연애의 모든 나날들을 다시 겪는다. 본인과 타인의 눈을 오가며.

who when where what how why를 또 한 번.


그럼에도 사랑하는 걸까. 그렇기에 사랑하는 걸까.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하며 남녀는 다시 사랑하려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나'도 '나'인가, 라는 질문에 이터널 선샤인은 그렇다고 답하는 듯하다. 세상에 어떤 기억의 조각이라도 남아 있다면 완전한 소멸은 없다. 영화도 그렇게 말한다. 남자는 기억을 지웠지만 찌그러진 차의 범퍼는 남자의 어젯밤을 알고 있다. 얼어붙은 호수도, 눈 내리는 정거장도, 해변가의 오두막도, 서로를 잊은 한 쌍을 둘러싼 채로 거기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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