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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씨 Oct 18. 2020

어느 가족일까요, 우리는

스포 있는 [어느 가족] 리뷰


도쿄의 시바타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일반적이지 않다. 집 주인인 할머니 하츠에의 연금에 더해, 어머니 노부요는 세탁 공장, 딸 아키는 유흥업소, 아버지 오사무와 아들 쇼타는 간단한 일용직 혹은 좀도둑질로 가족의 잔고를 채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빠듯한 생활이지만 평범한 집에 평범한 직업을 가진 다른 가족들보다 어째선지 더 밝은 저녁을 보낸다. 어느날, 오사무와 노부요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거리를 서성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한겨울의 추위에 혼자 서 있는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부부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다. 잠이 든 아이를 업고 아이의 집 근처에 도착한 부부는 창문 너머로 아이의 부모가 싸우는 소리를 듣는다. 누구 새끼인지도 모른다던가, 낳고 싶던 적도 없다던가 하는 말들이 오가는 곳에 아이를 돌려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부는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렇게 유리는 작은딸 린이 된다.



여느 어린이들이 그렇듯, 침입자를 가족으로 인정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아들 쇼타도 마찬가지다. 하룻밤 사이 생긴 여동생이 어색하기만한 쇼타는 린을 계속 밀어내지만 린은 지치지도 않는지 밀어내는줄도 모르는 건지 쇼타를 따라다닌다. 그러던 와중, 아버지 오사무가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다리를 다친다. 일용직의 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레 린에게도 좀도둑질을 가르치게 된다. 작은 가게에서는 직접, 큰 가게 또는 대형마트에선 직원의 시선을 끌며 오사무와 쇼타, 린은 좀도둑 트리오가 되어간다. 구멍가게의 주인 아저씨에게 '동생한테는 시키지 마렴.'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진.



어느날, 저녁 뉴스에 린이 나온다. 린, 유리, 아니 쥬리가 나온다. 사건은 아이의 실종과 아이가 실종됐음에도 두 달 동안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부모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구청에서 나온 가택인구 조사원에 의해 알려진 쥬리의 실종 사실, 가족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어느 가족>은 가족 영화가 맞다. 가족의 따듯함을 말하고, 소중함을 강조하며, 우리가 돌아갈 곳은 결국 우리의 가족이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언뜻 들으면 뻔해 보일 이 영화가 기생충 전년도의 황금 종려상 수상작인 이유는 그 전달 방식의 뒤틀림에 있다.



영화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가족 중에서, 실제로 피가 섞인 가족은 단 한명도 없다. 할머니, 아빠, 엄마, 큰딸, 아들, 작은딸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부부에겐 자식이 없고 할머니에겐 사위도 며느리도, 손녀도 없다. 그렇게 겹치는 유전자 하나 없는 이들이 모여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살아간다. 막노동과 도둑질, 세탁공장과 도둑질, 유흥업, 도둑질, 도둑질. 사람들의 손가락을 피해 뭉쳐 사는 가족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로 가족의 수입원은 도덕과 거리가 멀다. 카메라는 그들을 그저 바라보고 영화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불경기에 한탄하는 뉴스 속의 김 씨 가족을 바라보듯 도쿄 어딘가의 시바타 가족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 속의 가족들은 대칭적이면서 대조적이다. 사람과 살림살이를 넣고 나면 15%쯤의 여백이 남는 집에서, 시바타 가족은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작은 집에 가득 찬 범죄자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 화목함만 보고서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반대로, 쥬리의 가족과 큰딸 아키의 가족은 겉만 보면 가족이라는 단어의 평균점을 저 가족들로 세워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적당한 크기의 집에, 적당한 수의 가족 구성원에, 적법한 생계수단,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 어딘가의 분위기. 그러나 두 집 모두 사라진 딸을 사라진 그대로 찾지 않은 잔혹한 가정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타인의 무더기.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을 부정해 볼 틈도 없이, 작은 딸 쥬리도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아빠 오사무와 아들 쇼타를 따라다니며 도둑질을 돕는다. 쇼타는 아무것도 모르던 여동생이 처음 배워가는 게 도둑질이라는 사실이 자꾸 켕긴다. 쇼타의 도둑질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해주던 작은 구멍가게가 문을 닫은 어느 날, 쇼타는 큰 마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쥬리는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도 듣지 않은 채 쇼타를 따라 들어와 과자 봉투를 잡는다. 봉투는 어찌나 큰지 어린 아이의 몸으로는 가려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숨겨보려 움직이는 쥬리의 등과 팔을 바라보다가, 쇼타는 뭔가를 결심했는지 오렌지 한 망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쫓아오는 마트 점원과 그 뒤를 따라오는 쥬리. 앞뒤를 막은 점원들을 피해 쇼타는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다.



병원에 입원한 쇼타를 보러 온 오사무와 노부요 부부는 보호자 신분증을 제시해달라는 요청에 말같잖은 핑계를 대고 도망친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집에 도착했고, 간단하게 추린 이삿짐을 들쳐 멘 시바타 가족과 마주한다. 경찰은 쇼타와 쥬리를 유괴사건의 피해자로 대한다. 커다란 경찰서 건물 안에서, 구성원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방에 놓여진다. 조사관은 아들 쇼타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 너를 버리고 가려고 했어.'


그렇게 며칠간의 조사가 끝난 후, 엄마 노부요는 부부의 죄를 혼자 끌어앉고 수감된다. 쇼타는 보호시설로, 쥬리는 딸을 잃어버리고도 신고 한 번 없던 그 괴상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몇달 후, 쇼타는 수감중이던 엄마 노부요의 면회 요청으로 보호시설을 나와 아빠 오사무와 함께 교도소로 향한다. 셋이 나누는 대화는 너무나도 가족적이다. 오랜만에 귀국한 유학생을 반기는 부모의 감정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다. 쇼타의 근황을 듣고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엄마 노부요가 말한다.



"...너를 주운 곳은 마츠도에 있는 파칭코였어. 마츠도 파칭코 주차장.
차는 빨간색 도요타 빗츠.나라시노 번호판이었어. 원하면 친부모님을 찾을 수도 있어."

"그런 말 하려고 쇼타를 데려오라고 한거야?"

"맞아. 당신도 이제 알잖아. 우린 역부족이야. 이 아이한텐."

영화 [어느 가족] 中




다시 보지 못할 걸 굳게 마음 먹은 표정으로 노부요는 면회를 끝내버린다. 시설로 돌아가야 하지만, 쇼타는 시설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오사무의 집으로 향한다. 같이 밥을 먹고, 눈사람을 만들고, 같은 자리에 누워 부자가 잠을 청한다. 달빛 한 줄기만이 비치는 다다미방 이불 아래에서, 쇼타는 정적을 깨고 오사무에게 묻는다.


"있잖아...나를 두고 도망가려고 했어?"

"그랬지. 그 전에 붙잡혔지만..."

"그렇구나."

"미안하다. 아빠는...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

영화 [어느 가족] 中


 야속하게 해는 뜨고 아침이 밝아온다. 쇼타가 타야 할 버스도 차츰 다가온다. 쇼타가 버스에 올라타고, 문이 닫힌다. 아버지 오사무는 그제야 하지 못한 말이 떠오른 듯 쇼타의 이름을 부른다. 버스가 출발하고 오사무가 뒤를 쫓아 달린다. 버스는 속도를 올리고 길게 트인 버스 창문 가운데서 달리던 오사무는 점점 뒤로 사라진다. 그림자만 남아서 겨우 버스 뒤꽁무니를 쫓고 있다. 오사무의 뜀박질 소리가 닿았는지 쇼타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본다. 쇼타 말고는 그 뜻을 알 수 없을 눈빛으로 나지막이 그를 부른다.


"...아빠."

영화 [어느 가족] 中




 가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입에 담기 힘든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많다. 검색 몇 번만 해도 쏟아져내린다. 서로라는 이름으로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높게 뻗은 울타리가 누군가에게는 넘어볼 용기조차 앗아갈 높이의 장벽이 되기도 한다. 70% 정도의 아동학대 범죄에서, 아이들은 피고석에 앉아 원고석에 앉은 그들의 부모를 마주해야 한다.


 영화 속 경찰관의 입장에서, 시바타 가족은 규모는 작더라도 의심할 여지 없는 범죄집단이다. 어떤 사연으로 그들의 자식이 되었으며 그들이 어떤 가족이었는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쇼타와 쥬리는 자신들이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온 가련한 아이들이고, 오사무와 노부요 부부는 유괴범 주제에 친권 비슷한 걸 행사하려는 범죄자일 뿐이다.


 경찰관의 판단은 그들이 지키는 법과 그들이 수집한 증거 아래서 내린 가장 적법한 판단이다. 범죄를 미화하지 않는 카메라 덕분에 관객들 역시 시바타 가족이 언젠가는 붕괴될 것임을 예상하며 영화를 본다. 다만 관객은 알고 경찰이 모르기에 더욱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다. 쇼타와 쥬리가 유괴의 피해자가 아니라 유기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 파칭코의 주차장에서 발견된 쇼타의 부모는 차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쇼타를 잊어버린 채 도박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쥬리는 부모가 자신을 원한 적도 없었으며 친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포스런 생활소음에서 도망쳤다. 흔적도 없이 쥬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어쩌면 행운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신고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간 두 달이 그들에겐 꽤나 행복한 나날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두 아이들은 유기되었고 오사무와 노부요는 아이들에게 유괴범보단 구원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 중대한 사실을 경찰은 모른다. 세상도 모른다. 시바타 가족과 우리만이 아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제대로 된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피보다 진한 물이 여기 있고 어린이를 길거리로 내모는 천륜이 여기 있는데, 우리는 왜 가족이 아니며 태어나 몇 번 보지도 못한 당신과 나는 왜 가족일 수 밖에 없을까.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쥬리를 향한다. 우여곡절끝에 돌아간 집이지만 쥬리는 여전히 집 안에 있지 않다. 아파트 복도에서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쥬리는 작은 의자를 밟고 올라 난간 너머를 바라본다. 아마, 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게 아닐까 싶다. 린 가족의 부모는 린을 불렀고 두 명의 린이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지 않았을까 싶다. 쥬리 가족의 쥬리와 시바타 가족의 린. 이름 모를 어느 가족의 린을 바라보고 있는 쥬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어린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커버린 어른들은 그 표정만 봐서는 알 수 없다고들 한다. 엔딩에서의 쥬리의 표정만은 그 말에서 예외로 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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