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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근 Jun 28. 2022

하느님은 아담과 스티브도 만들었다.

모태신앙을 가톨릭으로 지닌 전지적 게이 시점의 이야기

돈 보스코라는 흔하지 않은 내 세례명은 기억조차 없는 시절 내가 유아 세례로 받은 세례명이다. 어머니의 세례명은 사비나이고 어머니가 친하게 지냈던 아주머니는 마리아 아줌마라고 불렀다. 우리 집에는 늘 예수상과 마리아상이 있었으며 어머니가 손에 끼고 있던 묵주반지는 내가 보아온 그 어떤 반지보다도 가장 예쁘고 신기한 반지였다.


모태신앙이 가톨릭인 내게 이러한 것들은 어렸을 적부터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내 신앙과 성정체성과의 충돌 역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성경은 동성애를 금기시하였고 성당의 교인들끼리는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를 피하는 분위기였다. 아니, 성소수자란 아예 없는 사람들 인양 굴었다. 그 성당에 게이 정체성을 가진 중학교 1학년 학생인 유상근이란 사람이 있을 거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이미지 출처: https://www.independent.co.uk/


그런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가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나이가 어린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성경과 사제들이 갖는 권위가 내게는 대단히 커 보였다.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주님보다도 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지는 냉담이었다. 1년 전만 해도 레지오와 성가대를 다니던 나는 1년 사이에 냉담을 하게 됐다. 정말로 신실한 가톨릭 신자셨던 어머니조차도 하루아침에 성당을 나가지 않겠다는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는 하느님이야. 성전은 내 안에 있는 거야.’라는 마음가짐을 아무리 되뇌어도, 기독교가 성서 근본주의를 따르는 이상, 가톨릭인들이 모두 성소수자를 비난하고 있는 이상, 이런 마음가짐을 성소수자 교인 혼자서 끌어안고 신앙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지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성소수자 교인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며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공동체와 교리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면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교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화살기도를 하며 신을 찾는 사람이고, 서구 문화나 그 문화권에서 영향을 받은 산물들이 왜 종교적 배경과 연관이 되어 있는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만큼 기독교에 친밀한 사람이다. 내 성정체성이 내 정체성의 일부인 것처럼 ‘어느 정도는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내 정체성의 일부인 것이다. 그런 만큼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톨릭이 성소수자 친화적이었다면 나는 계속 성당을 다녔을까?


이 질문만 놓고 본다면 아마 내 대답은 “예.”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신앙이 두터운 신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태신앙인 내게 가톨릭은 내 정체성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교리 공부를 하고 성당을 다니고 하는 것들은 내 삶의 일부가 됐을 것이다. 그게 내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함이 내게 편안함을 가져다 주진 못했다. 성정체성에 대한 적대감은 개신교가 더 심하게 보이긴 했지만 내게 있어 가톨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 둘 다 같은 성서와 같은 하느님 아래에서 시작한 종교였기에 근본적으로 성소수자를 적대시한다는 느낌은 똑같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기독교라는 종교는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종교, 성소수자가 신앙으로서 간직하기 어려운 종교로 남아 있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냉담을 하는 사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목회자를 모셔서 저마다의 공동체를 꾸리는 개신교, 가톨릭 신자 모임이 생겼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목회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늘었다. 퀴어문화축제에 성도들과 함께 참여를 이끄는 목사님과 신부님이 생겼고 퀴어 성서주석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변화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핍박도 있었다. 더 다양한 변화와 그에 따른 핍박을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가톨릭 공동체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평신도와 목회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때로는 말씀을 전하고 때로는 행동으로 옮기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 하지만 어떤 봉사, 연대의 형태로 이어지는 것들 중에서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가톨릭은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특히 본당이나 교구, 또는 청년 미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가톨릭계의 이름으로 성소수자와 연대한다는 활동이나 기사는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다. 물론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가톨릭의 이름을 내세워하는 작은 규모의 행동들은 몇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차원은 ‘가톨릭으로서 성소수자를 환영한다’는 평신도들의, 가톨릭 신자들의 환영 인사 같은 것이다.


이제 6월, 성소수자의 달이라고 하는 Pride Month다. 전 세계적으로 성소수자의 달을 기념하며 많은 대도시에서 퍼레이드가 열리며 한국 또한 이를 기념해 7월에 서울에서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무엇이라 말하든 주보에 한 줄쯤은 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께서는 성소수자도 사랑하십니다.’ 이 문장을 본 한 어린양은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소외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계속 성당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문장을 본 누군가는 자신의 종교가 포용적임을 느끼고 종교의 이름으로 성정체성을 배척하는 행위를 그만두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Freepik


물론 나이브한 상상이란 걸 안다. 그러나 나이브한 상상은 시도해보기도 쉬운 법. 장담컨대 한국에서 성당의 주보가 만들어진 이래로 성소수자를 사랑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가톨릭 교인도 정작 자기 성당의 누군가는 소외시킬 수도 있다. 그건 어느 단체나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 어떤 외부 집단을 적대시하고 있다면, 적대시하는 분위기는 왜 생겨났으며 그것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 판단해보고 논의해보고 토론해 볼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교리의 절대 권력이 되는 성경 아래에 가톨릭도 그러한 기회가 없었으리란 것이 나의 생각이다.


뜻깊고 생각 많으신 사제님들과 수녀님들이 많다는 걸 안다. 그리고 교구와 본당을 거슬러 행동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 한들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설 수 있는 분들이 한 발자국 내디뎌 평신도들에게 사랑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역풍도 불 것이고 윗선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걸 모두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리라 믿는다. Pride Month를 기념해 6월의 하루는 무지개 깃발을 걸기, 한 주의 주보에 응원의 메시지를 넣기, 무지개 초를 사서 봉헌하기, 그리고 이러한 의미들을 이런 칼럼을 써서 글을 발행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이런 작은 변화들이 결국 큰 징검다리를 놓는 초석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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