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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영 Dec 09. 2022

어제는 아버지의 마지막 항암이었다

나의 눈물버튼


어제는 아버지 마지막 항암치료에 동행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기 싫었고 아버지가 제안하기 전에 오빠의 부탁까지. 독립하기 전 마지막 도리라 느껴졌다. 집을 떠나면 이렇게 맞추기도 쉽지 않다는 생각에 6시 50분에 나가 11시 반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걸 스물 여덟 번 다니셨다. 예민한 성격 탓에 병원 가기 전부터 몸이 아파오는 증상을 겪으며 무서운 항암을 이겨냈다. 하루를 굶고 약 투여와 검사를 받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다음 날, 아버지와 외출한 김에 둘이서 한 번씩 가던 커피숍에 들르자고 말했다. 아버지는 기분전환 겸 그러자고 하셨고 무슨 할 말이 많았던 건지, 내게 사업보다 잘 맞는 회사에 들어가 스트레스 좀 받더라도 월급 생활을 하라 거듭 강조하셨다. 아버지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새겨서 그렇게 하라고. 거듭거듭. 다 맞는 말씀이라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커피숍에 다 와 갈 무렵. 아버지는 내 눈물 버튼을 눌렀다.


"영아. 어딜 가든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두 팔 뻗고 살아라.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고 친구들이 아무리 사무장, 부장 직급을 달고 잘나가더라도. 절대 꿀리거나 피할 이유도 없고. 네가 좀 없어도 친구들 만나서 밥 살 때 있고 네가 얻어먹을 때도 있는 거지. 너도 언제까지 없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문을 두들겨 봐야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너무 안 맞는 곳 말고 네 수준에 맞는 회사에 들어가서 차츰 발을 넓혀 가는 거야. 너는 얼마든지 잘 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원망했던 아버지. 지금도 가슴을 찢으며 울 수밖에 없는 이유. 평생 괴로움의 상처를 남겼던 사람. 부모님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울 수 없었다. 약한 모습 보이기 싫었고 내 슬픔을 아버지께 전달하기도 싫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목구멍이 뻐근하지만. 난 더 이상 울기만 했던 10대도 아니고 과거의 나보다 성장한 내가 있다. 그 땐 손발이 묶여 있는 기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날 준비를 하고 있다. 두 번의 사업과 경험. 아무도 없었던 상경과 귀향. 출판과 표현의 발돋움.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어린 나와 달라진 것은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실행할 수 있는 나로 바뀌었다.


언젠가 나의 10대, 20대의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만들고 싶다. 박해영 작가처럼 마음을 울리는 시나리오를 적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싶다. 아직 오지 않은 내년의 목표는 펀딩을 통한 개인 출판이다. 그중 나는 돈을 벌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할 테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멀리 가고 싶다.


스스로 가장 안타까운 건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나를 존중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나 외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의견을 편하게 말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노력하다 보면 마음을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서 어떻게 하면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그렇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를 악용하는 사람은 거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된다.


아버지 말대로 많이 울었으니 이제는 웃을 날이 온다. 내게도.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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