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는 것만큼 나는 노래 부르는 것 역시 꽤 좋아한다. 대학교에서 자취할 때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집안일을 하던 경우가 많았고 운전을 할 때면 차 안이 바로 내 전용 노래방이 되곤 한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왜 의아해하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노래방을 자주 가던 편이다. 미국에는 코인노래방이 없어서 일반 노래방을 가야 하는데 아마 내 친구들은 그 비싼 돈 내며 혼자 노래방을 가고 싶냐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느 취미생활이 그렇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쓰기 마련 아니겠는가. 맨날 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나름대로 친구들과 노래방에 갈 때 부르는 플레이리스트들이 분위기별로 다 따로 있는 편이다. 그래서 어느 분위기던지 맞춰줄 수 있지만 혼자 노래방을 갈 때면 주로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나만 아는 노래들 그리고 주로 잔잔하고 애절한 노래들을 많이 부른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곡은 락발라드와 인디곡. 내가 부르기 좋아하는 몇몇 곡들을 나열해 보겠다.
1. pale blue note - 엠씨 더 맥스
그 유명한 "어디에도"라는 노래가 들어가 있는 엠씨 더 맥스의 pathos앨범에 있는 수록곡들 중 하나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디에도 보다 이 노래를 더 좋아한다. 엄청난 고음으로 많은 남성들을 힘들게 하는 어디에도 와는 달리 이 노래는 적당한 가성, 미성, 진성이 섞여있어 그나마 조금 부르기 편하다.
"불안한 침묵으로 이별을 얘기하던
슬픈 표정마저 잊혀질까 두려워"
"우리를 써 내려간 창백한 노트 위에
푸르고 동그란 눈물 자욱의 그대"
노래를 볼 때 가사를 많이 보는 나는 이 곡의 저 네 줄의 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노래를 듣기 전 제목만 보면 어떤 의미인가 싶지만 가사에 써져 있는 "창백한 노트 위에 푸르고 동그란 눈물 자욱"을 들어보면 정말 잘 지은 제목이라는 걸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부분은 바로 1절과 2절 사이의 간주 사이에 흘러나오는 관악기 소리가 그렇게 애절하게 들릴 수 없다. 한 번씩 들어보길 바란다.
2. pony - 잔나비
잔나비의 팬이라면 아마 알고 있을 노래지만 잔나비의 유명한 곡들만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이 노래가 조금 생소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잔나비의 모든 노래들 중 이 노래를 제일 좋아한다. 도입부부터 들어가는 기타 소리와 레트로풍 분위기에 금방 매혹되니 말이다. 이 노래 역시 힘 빼고 부르기 좋은 편한 곡이라 노래방에서 자주 부른다.
"불빛 너머로
여전한 그 길따라 겨눠보던 미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네"
노래 멜로디를 빼고 저 가사를 읽으며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회심의 미소"라는 게 꽤 강력하게 와닿는 듯 몸에 전율이 흐른다. 불확실한 미래를 겨눠보며 짓는 미소 뒤엔 당찬 자신감과 약간의 두려움 하지만 미지의 것에 대한 설렘이 섞여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이 곡이 현대자동차 광고곡이었다는 건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됐다. 그러면서 뮤비도 함께 봤었는데 연출이 아티스트인 잔나비답게 아주 아름답다. 이 곡 역시 추천한다.
3. 타인의 기억 - 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을 열 손가락 안에 꼽으라고 하면 이 노래는 무조건 들어간다. 많이 알려진 "지구가 태양을 네 번"이라는 곡이 실린 넬의 Newton's apple 앨범에 있는 수록곡이다. 어느 가수의 어느 앨범이던지 잘 찾아 들어보면 타이틀곡 보다 수록곡들이 더 좋은 경우들이 많다. 내게 타인의 기억 역시 그렇다.
"널 한때는 눈물로 보내야만 했던
날을 이제 웃으며 얘기하고
잘 살고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궁금해하기도 해"
"마지막 한 번
너의 그 모습을
떠올리고 싶은데"
이 노래는 부르기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번 삑사리 없이 잘 부르면 희열이 느껴지는 곡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노래 계속 이어져 오던 고음의 에너지 이후 힘을 쭉 빼며 한탄하듯 내뱉는 마지막 세 글자 "싶은데" 부분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아웃트로가 꽤 긴데 이 부분도 특히 좋아해서 스킵하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 여기 소개한 곡들 중 내가 유일하게 기타로 독학해서 쳐본 곡이기도 하다.
4.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 - 015B, 오왠
1993년도에 처음 출시되고 리메이크가 여러 번 되었던 이 곡도 나를 금방 매료시켰다. 리메이크가 여러 번 되었다는 것 자체가 명곡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노래 분위기도 잔잔하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흘러나와 커피 한 잔을 즐기는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할 만한 그런 노래라고 생각한다.
"대신 너에게 부탁할게
우리 아름답던 기억들
하나도 잊지 말고
이 세상 동안만 간직하고 있어줘"
"모든 시간 끝나면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
그때 그 모습으로
다음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이 곡의 후렴구이다. 먼데이 키즈의 가을 안부라는 곡의 가사에 "추억은 짐이 아니라 살게 하는 힘이란 걸"이라는 가사가 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문구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래처럼 추억을 노래하는 곡들이 내게 특히나 더 매력적인 것 같다. 지르는 고음이 없어서 부르기도 편하고 자주 듣는 노래이다. 특히 후렴구의 마지막 가사인 "그때 그 모습으로 다음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는 말은 마음을 울리는 애틋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다.
최근 선물로 마이크와 간이 노래방 기계(?)를 선물 받아 혼자 노래방에 가는 일은 없어졌다. 노래방에 가고 싶을 때마다 집에서 노래방 기계와 노트북을 연결해 노래방 분위기를 충분히 낼 수 있고 시간당 20000원 넘게 아끼는 셈이 됐으니 이보다 훌륭할 수 없다. 뭔가 몰두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건 확실히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번외. L'Amour, les Baguettes, Paris - 스텔라장
스텔라장 팬인 나는 이 노래가 출시됨과 동시에, 아직 유명해지기 전에, 들어봤었다. 불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나는 이 노래의 가사들을 해석 없이 보면서 이해할 수 있었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파리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읽으며 내 최애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곡도 노래방에서 불러보고 싶었는데 최근까지 수록이 안되어있다가 이 노래가 뜨고 난 이후 노래방에 생겨서 한번 불러볼 기회가 생겼었다. 개인적으로 노래방에 필리핀, 베트남 노래들도 있는데 프랑스 노래들도 생기면 좋겠다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