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반주 #번외편
'파리의 심판'을 아시나요? 와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금도 활발하게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죠.
혹시 처음 들어보신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요약해볼게요. 지금은 미국 와인의 인기와 명성이 엄청나지만 1970년대만 해도 미국 와인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어요.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의 콧대도 아주 높아서, '어디 미국 와인 따위를 우리 와인이랑 비교해!'라고 할 정도였죠. 그런데 미국 와인이 품질에 비해 시장에서 저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한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라는 영국인 와인 평론가가 미국 독립 200주년이 되는 해인 1976년, 프랑스 와인에 정면승부를 걸었습니다. 와인이기에 가능한 방법, 저도 번외 편에서 소개드린 바 있던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요!
스티븐 스퍼리어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품질의 프랑스 와인들과, 미국의 와인들을 한 데 모아 와인 전문가들(11명 중 9명이 프랑스인)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고 그 순위를 매기는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은 '보나 마나 결과는 뻔하지 뭐, 역시 프랑스 와인이 최고라는 것만 증명될 거야' 라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실제 스퍼리어 본인도 정면승부를 걸긴 했지만 프랑스 와인이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요. 그로서는 정면승부라기보다는 호기심천국에 가까운 것이었겠죠.
하지만 스토리 전개 상 벌써 결과가 예상되시죠? 레드 부문/화이트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한 것은 바로 미국 와인! 직접 점수를 매긴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이 받았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이런 파격적인 결과에 이 사건을 '파리의 심판'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후 미국 와인의 인기가 급상승한 건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당시 1위를 거머쥔 와인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고이 전시되어 있고, 해당 와이너리들은 현재도 여전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30년 후 어게인 파리의 심판이라 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한 블라인드에서도 어김없이 미국 와인이 1위였다고 하니, 와인 종주국 프랑스의 오만함은 이제 조금 꺾였으려나 싶습니다. (프랑스 와인 사랑합니다♥)
그리고 지난주, 이 '파리의 심판'이 연상되는 '서울의 심판'이 벌어졌습니다. 진짜 파리의 심판처럼 대단한 건 물론 아니고, 제가 WSET을 배운 와인 학원의 시음회에 와인 메이트들과 함께 갔다가 생긴 소소하지만 재밌는 에피소드입니다.
와인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음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흔하게 오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특히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런 행사도 많이 줄어들었죠. 그나마 와인학원에서 진행하는 시음회가 정기적으로 있는데, 마감도 빠르고 평일 저녁이라 눈독만 들이고 있던 중 이번에 드디어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제도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화이트 와인(샤르도네 품종) 5종 시음회인데, '프랑스 부르고뉴 vs. 미국 나파밸리'가 테마였죠. 먹어보고 싶었던 와인들이지만 가격대가 꽤 있는 와인이라, 와인 1병 가격으로 5병을 비교 시음할 수 있는 황금과도 같은 기회였습니다. 거기다가 원래는 블라인드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즉석에서 시음회의 진행방식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되어 5개의 와인이 어떤 순서인지 모른 채 저희 앞에 놓이게 된 겁니다. 미니 파리의 심판이 기대되는 시음회였죠.
제가 완벽한 반주 1편에서 샤도네이를 맛볼 때, 프랑스와 미국을 비교해서 맛보시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까요? 그 특색이 많이 달라서 재밌다고 했는데, 그럼 당연히 블라인드로 마셔도 구분해 낼 수 있겠지,라고 아주 조금은 생각했습니다. 아주 조금이요. 파리의 심판에서 화이트 1위를 거머쥔 '샤토 몬텔레나' 와인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니, 그래도 미국은 미국이겠지'라고 자만했던 것 같아요. 저의 와인 메이트 들도 마찬가지고요 ㅎㅎ
테이스팅 시작 전, 프랑스와 미국 중 어느 곳의 화이트 와인을 더 선호하냐는 질문에 저희 셋 모두 '프랑스'를 선택했습니다. (사실 그 방에 계신 모든 분들이 프랑스를 선택했습니다) 시음회를 진행하신 소믈리에님은 어디 한번 결과를 두고 보자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셨지요. 이때만 해도 에이~라는 생각이 아직 5% 정도는 남아 있었습니다. 저 또한 오만했던 것이죠.
그리고 결과는 역시. 아무도 미국 나파밸리에서 온 와인이 5개 중 어떤 건지 골라내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명 중 두 명이 최애 와인으로 같은 미국 와인을 꼽았죠. 불과 한 시간 전 미국 화이트 와인보다 프랑스 화이트 와인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말이에요. 파리의 심판 1위인 '샤토 몬텔레나'였을 것 같지만 반전의 반전이랄까요, 다른 미국 와인 '파 니엔테(Far Niente)' 였답니다. 결과를 맞이한 순간 다들 씁쓸한 미소를 지었더랬죠. (참고로 나머지 1명은 부르고뉴의 샤샤뉴 몽라쉐가 최애 와인이었습니다)
1976년의 그 때 처럼 저희도 보기 좋게 심판을 당했지만 그래도 결국 샤토 몬텔레나와 파 니엔테 같은 와인들을 '유럽 스타일'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정통성이 구대륙, 유럽에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거예요. 하지만 이런 파리의 심판, 서울의 심판이 시사하는 바는 '그 누구도 와인을 마실 때 그 와인에 대해 속단하지 마라!'가 아닐까요? 지역, 브랜드, 가격 등 다른 어떤 것보다 와인 그 자체를 느끼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제 좀 알겠다 싶은 순간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라고 새침하게 말하는 와인의 매력에 오늘도 스며들고 있답니다. 여러분도 혹시 내가 어떤 와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의외의 최애 와인을 만나게 되실 수도 있을 거예요.